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브리튼의 <글로리아나>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아리에시아 2017. 1. 7. 11:58

20세기 영국 작곡가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을 한 명만 뽑으라면, 아마 벤저민 브리튼이 뽑힐 겁니다. <전쟁 레퀴엠>으로 유명한 브리튼은 합창곡, 가곡, 관현악 등의 여러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했으며, 20세기 현대 오페라 중에서 손꼽히는 작품인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비롯해 여러 오페라 작품도 남겼습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치러진 1953년, 브리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였고, 대관식 축하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저평가받고 입지가 미묘해진 작품이 됩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와 부군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대관식 초상화입니다. 브리튼의 <글로리아나>는 이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작곡되고 공연된 작품이지요.



<글로리아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주인공입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이보다 더 알맞고 의미 있는 선택지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영국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 위대한 여왕, 그리고 새로운 여왕과 이름이 같은 여왕이니까요. 엘리자베스 1세의 일반적 이미지는 영광 그 자체입니다. 사실상 사생아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위대한 영국 여왕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에스파냐와의 칼레 해전에서 승리하고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위대한 예술가가 다수 배출되어 잉글랜드 문화를 꽃피웠으며, 그만큼 위대한 여왕이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으니까요. 막상 칼레 해전은 날씨 덕분에 에스파냐 함대가 폭풍에 휘말려 잉글랜드가 운 좋게 승리한 것에 가까웠고, 셰익스피어 쪽도 딱히 엘리자베스 1세가 육성하거나 후원해 배출한 인재는 아니었다는 것 등은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것도 국왕의 덕목으로 여겨졌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렇게 한 것 역시 역량의 일환이니까요.


엘리자베스 1세가 주인공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를 영광스럽게 묘사할 대목은 많습니다. 어린 시절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는 이야기를 쓸 수도 있고, 칼레 해전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한 이야기를 쓸 수도 있으며,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자비로운 군주의 이미지를 그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브리튼은 그런 이야기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브리튼이 대관식 축전 오페라 주제로 택한 에피소드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말년, 여왕의 총신이었던 에섹스 백작의 반란으로 고뇌하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19세기에 이탈리아 작곡가인 도니제티가 <로베르토 데버루>로 이미 오페라로 만든 적 있습나다만, 브리튼의 작품은 도니제티의 <로베르토 데버루>와도 달랐지요. <로베르토 데버루>의 스토리라인 자체는 통속적인 삼각관계 이야기였고, 작품 속에 엘리자베스 1세라는 이름을 끼워넣은 것에 가까웠으니까요. <로베르토 데버루>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사모하는 남자가 다른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질투심에 불타며, 그 신하에게 나라에 반역을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자신을 버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캐릭터로 등장하지요.


에섹스 백작의 반란 무렵, 엘리자베스 1세가 60대 초반이던 1595년경에 그려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로, 초췌한 할머니의 인상으로 묘사된 초상화입니다. <글로리아나>의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초상화같은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글로리아나>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왕은 에섹스 백작을 총애하는데, 에섹스 백작은 경솔하고 충동적인 성품이라 여러 신하들이 그런 인물이 여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편 에섹스 백작은 아일랜드에서 반역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면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하지만 여러 신하들은 에섹스 백작이 군대사령관으로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라는 명분으로 에섹스를 아일랜드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며, 에섹스 백작은 이에 자신이 중상받고 있다는 식으로 대응합니다. 아예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이 아일랜드로 가는 것을 방해했다는 식으로 따지듯이 말하기도 하고요.


한편 잉글랜드 궁정에서는 무도회가 열립니다. 이 무도회 장면의 음악은 Opus 53a라는 분류번호와 함께,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어 종종 연주됩니다. 에섹스 백작부인은 원래 마련했던 드레스가 사라져서 다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오는데, 엘리자베스 1세가 사라졌던 에섹스 백작부인의 그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등장하면서, 그 옷은 에섹스 백작부인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에섹스 백작은 자신의 아내가 조롱당했다고 생각하고 분노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를 만나자마자 그 분노는 이내 풀리지요.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에섹스 백작을 아일랜드 반란진압군의 총책임자로 임명합니다. 


에섹스 백작은 아일랜드에서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경솔하고 충동적인 성품 덕에 실책을 거듭하며 오히려 반란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버리지요. 단순히 반란 진압에 실패한 것뿐이었다면, 직위를 반납하고 강등되는 정도의 처벌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섹스 백작은 여왕의 총애를 믿고, 철수 명령도 받지 않고 다짜고짜 혼자 궁전으로 돌아와버리며, 상황을 더한층 심각하게 만듭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에섹스 백작은 최소한 명령불복종, 웬만하면 반역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기에 이르고, 결국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여론은 에섹스 백작을 처형해야 마땅하다는 쪽으로 흘러갔고, 엘리자베스 1세는 고뇌하면서도 결국 에섹스 백작을 사형시키는 서류에 서명한 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외로움을 절절히 느끼며 오페라가 끝납니다.


<글로리아나>의 무도회 장면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곡, 작품번호 Opus 53a입니다. <글로리아나> 초연이 사실상 실패로 끝났고, 이 오페라가 묻혔던 지난 수십 년 동안에도, 이 음악만은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음악은 좋고 극적 구성도 훌륭하지만, 21세기인 오늘날 관점으로도 대관식 축하 오페라로 적합한 줄거리라고 하기는 힘들지요. '영광된 여왕'과는 거리가 있는 스토리니까요, 성품의 결함이 심도 있게 묘사되며, 여왕은 내내 괴로워하고 고뇌하기만 합니다. 하물며 1953년에는 더 말할 것도없었을 겁니다. 1953년 초연 때의 기록에 따르면 <글로리아나>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청중의 반응은 냉담하다는 쪽에 차라리 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브리튼 작품 중에서 인기 없고 호응 없고 평가 안 좋은 작품으로 손꼽히는 신세였지요. 이 작품이 다시 조명받은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고뇌하는 모습이 유약한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면모로 재조명되는 시대가 도래한 뒤에서야, 비로소 영국 여왕을 저렇게 묘사한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축하 오페라만 아니었어도, 이 작품이 이보다는 일찍 재조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떨치기가 힘듭니다. 지난 2013년 영국 로열 오페라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이 작품을 재공연하기는 했습니다만(현재 유일한 한글 자막 <글로리아나> 오페라 영상이 이 공연을 수록한 것입니다), 이 공연은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의 100주기를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고,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축하작품이었다는 전적이 없이 작품 자체로만 본다면 여왕 즉위 기념행사 기념공연으로 채택되었을지 궁금해질 정도의 줄거리인걸요. 왕실 기념 행사로 무조건 용비어천가 작품만 공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군주가 주인공인데도 영광스런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불편하기까지 한 소재를 굳이 선택해야 했을 이유도 딱히 없었지요. 차라리 영국 역대 국왕과 전혀 상관없는 주제를 택했어도, 이보다는 덜 외면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러고보면 브리튼은 1940년 일본의 일명 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에서도 비슷한 행적을 보였던 전적이 있었지요. 일본은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 근거해 1940년이 일본 천황가가 성립된 지 2600주년 되는 기념비적인 해라고 선포한 뒤, 프랑스, 헝가리, 독일 등 여러 유럽 국가에 2600주년 기념 축하곡을 의뢰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일본의 축하곡을 의뢰받자, 당시 활동하던 영국 작곡가 중 단연 손꼽히던 브리튼에게 그 작품을 위촉했지요. 브리튼이 의뢰받고 작곡한 기념곡의 제목은 '진혼 교향곡 Sinfonia da Requiem'으로, 진혼곡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장중한 음악이었습니다. 음악 자체는 일본 황실 2600주년 기념곡 중에 거의 유일하게 음악적 작품성을 인정받는 명곡입니다만, 음악 자체는 왕실 성립 2600주년같은 장대한 기념행사에 연주할 법한 음악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제목부터가 진혼곡이라고 되어 있지요.


브리튼의 진혼 교향곡은 260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연주되지 않았는데, 공식적 이유는 일정에 맞추어 충분히 연습하기에는 곡이 너무 늦게 완성되어 시간이 촉박하기에 제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진혼교향곡이라는 작품이 축하행사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진혼교향곡을 감상하면, 음악 자체는 좋은데, 남의 나라 왕실 2600주년 축하행사 같은 자리에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음악을 작곡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 개인적으로는 베르디가 프랑스 파리 오페라에 작품 의뢰를 받고, 프랑스가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을 군사점령하려던 역사적 사건을 이탈리아인의 입장에서 묘사한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작곡한 것만큼이나이해가 안 됩니다. http://blog.daum.net/ariesia/109 황기26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작곡된 다른 노래들이 하나같이 형편없는 졸작이었는데다가, 황기 2600주년 기념식 자체가 일본제국 체제를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오늘날에는 역설적으로 그 행사에서 제외된 진혼교향곡이 거의 유일하게 기억되고 있지만요.


브리튼은 일본제국 및 황기 2600주년 기념식의 진면목을 꿰뚫고, 그 행사를 위한 음악으로 '진혼교향곡'을 작곡한 걸까요? 작곡가 본인이 말하지 않은 이상, 추측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실은 알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13년 후인 1953년, 브리튼의 자국 여왕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한 오페라로, 영광스러운 이미지로 기억되는 엘리자베스 1세의 성격적 결함과 고뇌를 강조한 작품을 작곡했지요. 이 둘 사이에는 일관성이나 연관성이 있을지는, 역시 추측의 영역 안에 있겠지요.


브리튼의 진혼교향곡으로, 아데스의 지휘 하에 BBC 교향악단이 연주한 영상입니다. 음악은 정말 좋은데, 타국 왕실 2600주년 축하행사를 기념하는 음악으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네요. 예술작품 중에는 프랑스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화나 http://blog.daum.net/ariesia/5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처럼 http://blog.daum.net/ariesia/104 작품을 의뢰한 주문자 개인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예술적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 은근히 많은데, 진혼교향곡은 그 중에서도 여러 의미로 손꼽힐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