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1859년 작품 <가면 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는 1792년 일어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오페라입니다. 소재가 아니라 모티브라고 한 이유는, 오페라 내의 사건은 오페라 결말부에서 가면 무도회에서 암살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암살자는 앙카스트룀이며 그 피해자는 구스타프 3세라는 점 정도를 제외하고는 실제 역사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면 무도회>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 이탈리아식으로 구스타보 국왕은 아멜리아라는 여인을 짝사랑하고, 곧 개최될 무도회에 아멜리아가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만으로도 기뻐합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그 남편은 구스타보 국왕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장 신뢰하는 귀족인 레나토 앙카스트롬, 스웨덴식 이름은 앙카스트룀인 그 사람이었습니다. 구스타보 국왕은 아멜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의 아내, 그것도 친구의 아내라는 것 때문에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웬 점쟁이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추방시켜 달라는 청원이 들어오자, 구스타보 국왕은 그 점쟁이에 대해 알아보겠다면서 변장하고 직접 찾아가기로 합니다.
구스타보 국왕이 울리카라는 이름의 그 점쟁이를 찾아갔을 때, 구스타보는 아멜리아가 몰래 울리카를 찾아온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멜리아가 울리카에게 말하길 자신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 감정을 잊는 비법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울리카는 밤에 처형장에 혼자 찾아가 그곳에 돋아난 약초를 먹으면 될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 다음으로 구스타보 일행이 울리카에게 점을 쳐 달라고 하는데, 울리카는 지금 찾아온 손님이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과, 이 다음 순간 가장 먼저 악수하는 사람에게 살해될 운명이라고 점을 칩니다. 그 순간, 레나토가 급히 국왕에게 알릴 것이 있다며 그곳에 들어오고, 인사로 악수를 합니다. 사람들은 국왕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충실한 신하인 레나토가 국왕을 암살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울리카의 예언이 틀렸다며 안도합니다.
한편 구스타보는 한밤중에 홀로 약초를 뽑으러 처형장처럼 위험한 장소에 간 아멜리아를 따라갑니다. 구스타보는 아멜리아를 만나고, 아멜리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아멜리아도 자신이 사모하는 상대가 바로 구스타보라고 고백하지요. 구스타보와 아멜리아는 서로 상대를 짝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동시에 자신은 구스타보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레나토의 아내이며, 둘은 레나토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어지면 안 되는 사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순간 레나토가 구스타보를 찾아 그 곳에 나타납니다. 레나토는 국왕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 세력이 이 근처에 있으니, 구스타보가 급히 몸을 피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레나토는 심지어 국왕의 망토를 자신이 입고 자기가 국왕으로 가장해 적들을 유인할 테니, 그 동안 구스타보는 안전하게 몸을 피하라는 말까지 합니다. 아멜리아에 대해 알릴 수 없는 구스타보는 국왕이 피신해야 한다는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고, 아멜리아는 당장 구스타보가 피신하지 않으면 자신이 쓴 베일을 벗고 누구인지 알릴 테니 당장 피하라는 말까지 하였기에, 결국 레나토의 제안을 따르기로 합니다.
구스타보는 베일을 쓴 채 그곳에 같이 있던 아멜리아를 레나토에게 맡기면서, 베일을 쓴 여인이 누구인지 절대 드러나지 않게끔 보호해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레나토와 베일을 쓴 아멜리아는 중과부적으로 곧 일당에게 잡히고 말았고, 그 일당들은 국왕과 같이 있던 여인이 누군지 알면 레나토를 곱게 보내주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레나토는 구스타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 여인을 보호하고 맞서 싸울 각오를 하지만, 아멜리아가 레나토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베일을 벗어던집니다. 그리고 구스타보 국왕과 같이 있던 그 여인이, 바로 레나토의 아내인 아멜리아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됩니다. 레나토는 극심한 충격을 받고, 그 일당은 레나토를 한껏 조롱하며 풀어줍니다. 실제로는 서로 짝사랑하던 두 남녀가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만난 것에 가깝지만, 그 상황은 둘이서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멜리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레나토는 아멜리아더러 아들과 명예를 위해 자결하라는 식으로 말하고, "오 너였구나, 내 명예를 더럽힌 자가 Eri tu"를 부르면서 국왕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국왕 암살 음모를 꾸미던 혼과 리빙을 초대한 후, 그 일당에게 자신도 국왕 암살 계획에 합류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가면 무도회에서 국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레나토가 암살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막상 구스타보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레나토를 핀란드 총독으로 승진시키고 아멜리아도 함께 파견하여, 아멜리아에 대한 감정을 의무감으로 억누르며 회한에 잠깁니다. 그리고 가면 무도회 날, 레나토는 구스타보의 시종인 오스카를 교묘하게 설득해서 국왕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알아냅니다. 그리고 오스카가 알려준 복장을 입은 사람을 저격하고, 구스타보 국왕은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가면 무도회에 있던 사람들은 국왕이 저격당했다는 것에 경악하고, 그 암살자가 바로 레나토라는 것을 알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구스타보는 죽어가면서도 아멜리아는 결백하다고 말하고, 국왕을 암살한 헤나토를 국왕의 권한으로 사면하며 핀란드 총독으로 파견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구스타보는 세상을 뜹니다.
바리톤 김동원이 "오 너였구나"를 부릅니다. 자신이 섬기는 국왕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면서, 배신당한 비참한 기분을 처절하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가면 무도회>는 꽉 짜이고 치밀한 구성과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오페라로, 베르디 특유의 장중한 정서와 음악이 압권인 작품입니다. 또한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도 검열 때문에 유난히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프랑스에서는 다니엘 오베르가 이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오페라 <귀스타브 3세>를 이미 1833년 문제 없이 공연한 적 있습니다만,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는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아무리 실화에 기반한다고 해도, 국왕을 암살한다는 설정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베르디 측에서는 포메른이라는 독일의 소국을 끄집어내서, 스웨덴 국왕이 아니라 포메른 지역을 다스리는 대공이 암살당한다는 설정으로 바꾸기로 했고, 이 설정은 검열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작곡하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포메른 대공이 암살당한다는 설정도 검열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통보가 내려집니다. 1858년, 펠리체 오르시니라는 이탈리아인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던 사건이 터져서, 이탈리아에서는 왕족을 시해한다는 설정 자체가 허가받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베르디 측에서는 스웨덴 국왕을 포메른 대공으로 바꾼 것으로도 모자라서, 다시 미국 총독으로 바꾼다는 타협안을 궁리해냈습니다. 왕족이 아니라 고위 관료가 암살당한다는 식의 설정은 마침내 검열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 백여 년 동안, 베르디의 <가면 무도회>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구스타보가 아니라 미국 총독 리처드/리카르도가 등장하는 극으로 공연되었지요. 그리고 국왕 시해 음모를 꾸미는 인물인 혼 백작과 리빙 백작은, 졸지에 총독 암살 음모를 꾸미는 톰과 사무엘이라는 인물로 이름과 신분 설정이 바뀌어 등장하게 됩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의 초상화입니다. 왼쪽 가슴에 세라핌 훈장을 달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구스타브 3세가 가면무도회에서 암살당했을 때, 이 초상화와 비슷한 분위기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왼쪽 가슴에 세라핌 훈장을 달고 있는데, 암살당했던 가면무도회에서도 저 훈장을 패용하고 있었습니다. 가면무도회 때 구스타브 3세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저 훈장을 달고 있었기에 국왕 신분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 되었고, 암살자도 이 훈장으로 구스타브 국왕을 식별해 암살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면 무도회>의 줄거리는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점이 별로 없었지만, 검열 통과 여부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오페라와 실제 역사가 일치하는 점은 별로 없습니다. 죽은 사람 이름, 죽인 사람 이름, 사망한 장소, 총에 맞은 즉시 즉사하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사망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구스타브 3세가 암살당한 것은 신권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귀족 계층과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고, 암살자인 앙카스트룀은 사면은커녕 국왕 암살범으로 고통스럽게 처형되었습니다. 앙카스트룀의 이름도 레나토가 아니라 야코브 요한 앙카스트룀입니다. 앙카스트룀도 오페라에서처럼 구스타브 국왕과 가장 신뢰하는 친구같은 사이였다는 증거는 딱히 없습니다. 오페라에서는 레나토가 국왕의 시동인 오스카를 교묘하게 설득해서 가면무도회에서 국왕이 입은 옷을 알아내고, 이것이 드라마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구스타브 국왕이 세라핌 훈장을 패용하고 있었기 떄문에 신분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국왕 암살 계획을 꾸미는 귀족 세력이 있었다는 것도, 실제 역사에서는 신권과 왕권이 대립한 데에서 비롯했지만, 오페라에서는 국왕이 법에 따라 처벌한 적 있는 것을 애꿎게 원한을 가졌더라는 식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질 만큼 스웨덴의 왕권-귀족 세력 대립은 극심했고 귀족 세력도 강했는데, 구스타브 3세의 외아들인 구스타브 4세 때는 국왕이 추진한 정책이 실패했다는 이유 등이 겹쳐져, 아예 귀족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 일가를 추방하게 됩니다. 그 뒤에 구스타브 3세의 동생인 칼 13세를 새 국왕으로 세웠지만, 이번에는 칼 13세의 후계자 문제가 생겨납니다. 칼 13세에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도 몇 없었으며 그나마도 칼 13세가 즉위한 직후 연달아 죽어나가자, 왕위를 이을 사람이 공백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폐위시켰던 국왕인 구스타브 4세의 아들을 다음 왕으로 삼자는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될 정도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스웨덴에서는 아예 왕족 혈통과는 무관해도 유능함이 입증된 인물, 특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능한 군인을 다음 후계자로 삼자는 방안이 대두됩니다. 스웨덴에서 선출한 다음 후계자는 나폴레옹의 장군이었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였고, 이 장군이 칼 13세의 뒤를 이어 스웨덴 국왕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으며, 현재의 스웨덴 왕조인 베르나도테 왕조의 시조가 됩니다. <가면 무도회>에서는 삼각관계 구도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치적 요소는 극도로 희석시켰고, 당시의 실제 역사 및 정치적 상황이나 이런 후일담과는 무관한 이야기가 되었지만요.
그런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실제 역사와 동떨어진 와중에도, 의외로 세부적인 디테일은 실제 역사를 따르는 점이 은근히 많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런 점을 보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사람 이름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실상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했던 푸시킨같은 경우와는 달리, http://blog.daum.net/ariesia/41 자료 조사를 할 만큼 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오페라에 어울리는 소재가 되게끔 일부러 실제 내용과 동떨어지게 각색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점쟁이 울리카는 실존인물로서, 구스타브 3세의 암살을 예언했다는 이유로 실제로 암살 사건이 벌어진 뒤에 고초를 겪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오페라 내에서 구스타브 왕의 왕비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마 왕비가 등장해서 딱히 할 일도 없는데다 등장하면 플롯이 난잡해지기 쉬우니 일부러 뺀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설정이 되었습니다. 구스타브 3세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국가적 동맹 관계 때문에 정략결혼한 아내 소피아 마그달레나에게도 별 감정이 없었으며,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와는 왕비가 참석해야만 하는 공식석상에서나 동반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는 당시 스웨덴 궁정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일 것이라 여겨졌고, 훗날에는 아마도 스웨덴 역사상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수식어도 종종 붙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와 오페라 줄거리가 딴판이라는 점은, 검열 통과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픽션에서는 웬만해서는 통과되기 힘든 극단적인 줄거리도 비슷한 내용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면 검열을 수월하게 통과한 사례가 많았지만, 국왕 암살이라는 소재는 19세기에서는 특히 민감한 문제였지요. 1858년 이전에만 해도, 국왕이 아니라 격이 낮은 소국의 왕족이라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하지만 1858년 펠리체 오르시니가 벌인 사건 이후, 아예 왕족이 암살당한다는 소재 자체가 불허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오르시니 사건은 오늘날에도 널리 공연되는 명작 오페라를 역사에서 지워버릴 뻔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파급효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1858년 1월 14일, 펠리체 오르시니라는 이탈리아인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오르시니는 리소르지멘토 이념을 열렬하게 추종하고 관련 활동을 하던 인물로, 당시 오스트리아의 속국 신세이던 이탈리아의 독립 및 이탈리아 지역 소국들의 통일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르시니가 나폴레옹 3세 암살을 계획한 이유는 어처구니없었는데, 나폴레옹 3세가 소싯적에는 리소르지멘토 활동을 열렬하게 지지했지만, 프랑스의 황제가 된 뒤에는 딱히 이탈리아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와 황후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지겠다는 암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돕지는 않아도 최소한 척은 지지는 않은 상황이었는데, 다짜고짜 프랑스 황제와 황후를 암살하겠다니, 정말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암살 동기였습니다. 동기가 황당한 건 둘째치고, 저런 사건이 이탈리아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한 것인지, 따져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면 프랑스 황제가 이탈리아를 돕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이탈리아를 속국으로 삼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한 분노보다 더 컸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어처구니없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요. 다른 건 차치해도, 프랑스 황제를 암살하면 프랑스에서 분노하고 프랑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 뻔한데, 그 상황에서 고작 그런 이유로 타국의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황당무계한 계기와 현실인식을 보면, 프랑스 황제를 암살하면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얄팍한 현실인식과 황당무계한 계기와는 별도로, 실행력은 있었는지, 폭탄을 제조하고 황제와 황후가 탄 마차 근처에서 폭발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해버립니다. 이 암살 시도 자체는 실패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오르시니의 이상과 목표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858년 프랑스 황제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그 인물, 펠리체 오르시니의 초상입니다.
펠리페 오르시니가 암살하려고 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초상화입니다. 그 유명한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로, 나폴레옹의 남동생인 루이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의 첫번째 부인인 조제핀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결혼 생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사촌끼리 결혼하는 일이 흔했고, 재산상속 문제 등으로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사례도 여럿 있었기에, 의붓딸과 남동생을 결혼시키는 것 자체는 딱히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현대에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과 혈연관계가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당대 사람들은 모두 나폴레옹의 조카라고 생각했으니, 역사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겠지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지 4년 후인 1862년, 나폴레옹 3세 암살 미수 사건을 그린 그림입니다. 황실 마차 근처에서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개인적으로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동조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황제가 된 이후에는 프랑스 통치자로서의 행동을 우선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국민여론이 반대하는 일은 추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황제의 권한을 동원해 여론조작에 가까울 정도로 여론몰이를 한 뒤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나간 적은 있어도, 국민들이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이지는 않는 것을 행동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당시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 독립운동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이었습니다. 그 취지에 공감하든 공감하지 않든 간에, 이탈리아 문제에 굳이 프랑스가 개입해 프랑스군이 싸우거나 프랑스의 국고를 동원할 이유는 없다고들 생각했지요. 영국을 견제한답시고 영국 식민지인 미국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만큼 국고가 휘청였던 역사적 사건 하나만으로도, 그런 풍조가 생겨날 만했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를 속국으로 삼았다지만 이탈리아 민중들을 딱히 물질적으로 핍박한 것이 아니었고 나름대로 자치권도 폭넓게 인정했기에, 이탈리아 독립 문제를 민중들은 그럭저럭 생활하는 상황 하에서 지식인 계층의 민족의식 문제 정도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그리고 나폴레옹 3세는 굳이 이런 정서에 반하지 않고,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프랑스 나라 차원에서 지지하는 정책은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히 별 행동 안 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암살당할 뻔한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 3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프랑스 황제 권한을 동원해 방해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자신을 암살하려 한 오르시니를 갸륵한 애국자처럼 묘사하는가 하면, 프랑스 황제 차원에서 이탈리아 독립 운동의 당위성을 표명하는 언행을 여러 번 하며, 관련 보도도 적극적으로 후원합니다. 프랑스 황제의 적극적인 지지 움직임에 힘입어, 프랑스 여론은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돕자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구도에서 국제 외교력 등을 총동원해, 다른 강대국들이 이탈리아에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 이탈리아에 군사, 물자 지원을 하기 시작합니다. 1858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사르데냐 왕국 측은 플롱비에르 협약을 맺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 독립 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가 프랑스 입장에서 투입 비용에 비하면 딱히 득 될 것도 없어 보이는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나폴레옹 3세 개인이 이탈리아 독립 운동 취지에 동조했기 때문이라는 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을 후원했던 것처럼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을 약화시킬 기회라고 여겼다는 설, 탄압받는 사람들을 프랑스의 국력으로 돕는다는 어젠다 때문이라는 설, 나폴레옹 3세 본인은 이탈리아 독립 및 통일에 힘을 보태고 싶어했는데 아예 이 사건을 계기로 삼아 활용했다는 설 등이 제기됩니다. 아마 그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실제 원인에 가까울 듯합니다. 실제 원인이 무엇이었건, 프랑스가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은 이탈리아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프랑스의 외교력과 각종 지원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게 여러 차례 승전을 거두며 이탈리아 측 영토를 넓혀가기 시작합니다. 훗날 역사에서는, 이 시기가 본격적인 이탈리아 통일 움직임의 시작이라고 평하게 됩니다.
다음해인 1859년, 프랑스는 이탈리아 몰래 오스트리아와 비밀 협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 독립 운동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합니다. 그러고는 이탈리아에게 오스트리아 측과 휴전하라는 이야기를 사실상 통보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이탈리아가 프랑스 측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로는 이탈리아 혼자서는 오스트리아 측과 맞서는 것은 중과부적이었다는 것 등의 상황이 겹쳐저서, 이탈리아 축은 결국 타의로 휴전하고 통일 시도를 중단한다는 것에 합의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미 타올랐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불씨까지 꺼진 것은 아니었고, 곧이어 이탈리아 내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이탈리아 통일 전쟁을 다시 시작합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점차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로 승전하며 오스트리아의 영역을 좁혀나갔고, 1870년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완전하게 축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했으니, 바로 오늘날 이탈리아의 전신입니다.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 미수 사건은 프랑스가 이탈리아 독립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계기가 되어 이탈리아 통일의 초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쳤고, 프랑스가 철수한 뒤에도 그 때 생겨난 추진력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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