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바그너의 <로엔그린>과 드레스덴 봉기, 루트비히 2세와 노이슈반슈타인 성

아리에시아 2016. 12. 3. 11:56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의 첫번째 노래인 '혼례의 합창'은 일명 '결혼 행진곡'으로 유명한 음악입니다. 결혼식에서 굉장히 자주 쓰이는 음악이지요. 결혼식 축하용으로 피아노 편곡된 버전이 워낙 유명해서, 숫제 성악곡이 아니라 기악곡으로 훨씬 더 많이 연주되는 곡이기도 합니다.


13회 대구오페라축제에서 공연된 <로엔그린>에서, 혼례의 합창 대목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로엔그린>은 억울한 누명을 쓴 여주인공을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기사가 구해준다는, 전형적인 중세 로망스의 줄거리를 갖춘 작품입니다. 의문의 기사는 자신의 정체를 절대 질문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여주인공 엘자를 구해주고, 엘자와 맺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엘자는 금기를 깨고 결혼식 직후 남편이 된 남주인공에게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남주인공은 자신은 성배를 지키는 가문의 일원으로,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이며, 금기가 깨졌으니 이제 여주인공 옆에 있을 수 없다면서 헤어지게 됩니다. 여주인공은 금기를 깨고 남주인공은 이별하게 되기 직전, 둘의 결혼식을 축하하면서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결혼 행진곡'으로 유명한 '혼례의 합창'입니다.



<로엔그린>은 작품 자체로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작품 외적으로도 외부적 사건과 여럿 연관되었습니다. 만약 <로엔그린>이 희대의 졸작이라도 해도, 이 작품에 얽힌 외부적 사연 때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로엔그린>은 1850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는데, 막상 작곡가인 바그너는 이 초연 무대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초연 1년 전인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서 봉기 측에 가담했다가, 봉기가 진압된 뒤 졸지에 수배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드레스덴 봉기는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시민 봉기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시위였는데, '5월 혁명' 등으로도 볼리지만, 별다른 반향을 남기지 못하고 이내 진압되었기에 봉기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됩니다. 바그너가 드레스덴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드레스덴 봉기, 바리케이드 모습을 묘사한 당시 그림입니다.



그리고 <로엔그린>은, 오페라 역사상 손꼽히는 후원 관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로엔그린>을 보고 감동받아 바그너의 팬이 된 것입니다. 루트비히 2세는 많은 빚을 지고 도피하던 신세였던 바그너를 불러들여, 빚을 모두 갚아주고 안락한 환경을 마련해주며 대대적으로 작품 활동을 후원합니다. 바그너가 자신의 작품은 기존 극장의 구조와 맞지 않고, 자신이 고안한 새로운 구조의 극장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하자, 즉각 바그너 작품만을 공연하기 위해 새로운 극장을 지어주기도 했지요. 이 극장이 오늘날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음악 축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극장입니다. http://blog.daum.net/ariesia/101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작품만을 위한 극장을 따로 건축하는 것을 비롯해, 말 그대로 바그너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습니다. 덕분에 바그너는 장대한 대작을 여럿 작곡할 수 있었지요. 루트비히 2세의 후원이 없었다면,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같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작품을 완성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비롯해 바그너의 작품들이, 당시 오페라 관객에게 엉뚱하고 황당무계해보일 정도로 생소하고 새로운 형식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과연 일반 청중을 상대로 일반 극장에서 활동했을 때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지 회의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상 사진입니다.



하지만 <로엔그린>에서 비롯된 바이에른 국왕의 후원은, 훈훈한 미담 대신 파괴적일 정도로 극적인 파국으로 끝나게 됩니다.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를 후원한답시고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과 바그너만을 총애하는 것 때문에 여론이 나빠져서, 루트비히 2세는 결국 타의로 바그너를 내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작품에 나올 법한 중세풍 성을 짓겠다고 나섭니다. 이 때 지은 성이, 디즈니 로고의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한 노이슈바인슈타인 성입니다. 19세기 성인데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중세풍이며, 내부 인테리어도 중세 분위기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장식했지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모습입니다.


백조가 이끄는 배를 타고, 엘자 앞에 나타나는 로엔그린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내부를 장식한 중세풍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다른 캐릭터들의 의상은 그럭저럭 중세 분위기인데 비해, 엘자의 의상은 중세 여성 의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데, 아무래도 중세 고증 대신 오페라 의상을 기초로 그린 그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루트비히 2세의 바그너 팬 활동은 노이슈반슈타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건물을 지은 것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운명마저 비극적으로 만드는 단초가 됩니다. 루트비히 2세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비롯해 이런저런 건축물을 짓는 데 천착하고 나랏일은 뒷전이며, 무엇보다 건축비를 마련하겠답시고 일국의 국왕이 돈을 빌릴 궁리까지 하게 되자 바이에른 신하들의 여론은 엄청나게 나빠집니다. 루트비히 2세가 왕실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려는 것도 체면이 깎이는 일인데, 바이에른 왕국의 주권을 담보로 외국에서 돈을 빌리려 한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퍼지기까지 합니다. 결국 신하들은 '반역'을 계획합니다. 루트비히 2세가 정신이상이라는 의학 진단서를 위조해서, 요양 명목으로 강제로 시골 별장에 보내버린 후 왕실 친척을 섭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성공합니다.


루트비히 2세의 정신병 진단은 날조된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 진단을 한 구덴 의사는 루트비히 2세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루트비히 2세를 모셨던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취합하여 정신이상이라는 진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덴 의사는 루트비히 2세의 주치의 명목으로 루트비히 2세와 함께 슈타른베르크 호수의 별장에 거주하라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 직후 구덴 의사와 루트비히 2세는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루트비히 2세의 사인은 일단은 익사였고 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었으며, 구덴 의사의 몸에는 많은 외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호수는 사람 허리 높이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얕았기에, 사람이 사고로 익사할 가능성은 전무한 곳이었습니다. 루트비히 2세에게는 외상이 없었기에, 의문점은 더욱 커졌지요. 그래서 루트비히 2세가 탈출하려 했든 자살하려 했든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고, 구덴 박사는 루트비히 2세를 말리려고 했으며, 루트비히 2세가 구덴 박사를 뿌리치기 위해 거칠게 대했다는 것이 일단 정설입니다. 얕은 호숫가에서 사람이 익사하는 것도, 루트비히 2세에게는 외상이 없는데 구덴 박사에게는 외상이 있는 것도 모두 설명되는 가설이니까요.



이 모든 일을 <로엔그린>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될 겁니다. 당장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궁전도 2곳이나 지었고, 그나마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궁전을 모방해서 지었는지라 건축문화적 가치도 딱히 없지요. http://blog.daum.net/ariesia/155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지 않았더도, 루트비히 2세가 나랏일은 제쳐 두고 빚을 내며 건물을 짓다가 결국 쫓겨나는 결말을 맞았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으며, 그렇다고 딱히 건축적 소양이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린더호프 궁전과 헤렌킴제 궁전은 프랑스 궁전을 대놓고 따라해 지었고, 노이슈반슈타인 성도 시대착오적인데다 중세풍 이미지에만 천착해서 실용성은 굉장히 떨어집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왕이 이 작품을 보고 작곡가 후원을 결심하게 되어, 현대 오페라에 큰 영향력을 끼친 바그너의 대작 오페라와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인과 관계가 존재하고 있지요. 바그너는 아리아 위주였던 오페라 대신 일명 무한선율을 창안했고, 마치 등장인물의 심정이나 분위기 등을 나타내는 배경음악이 끊이지 않고 연주되는 가운데 연극하는 듯한 오페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은, 20세기 오페라의 전형이 되었지요. 20세기에 작곡된 인기 오페라 중, 바그너 스타일을 따르지 않는 작품은 <나비 부인>, <투란도트> 등 푸치니 작품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바그너가 없었다면, 혹은 바그너가 <로엔그린> 초연 직전 빚쟁이 도망자 신세가 된 이후 계속 그런 처지여서 다른 작품을 작곡하고 발표할 수 없는 처지였다면, 20세기 오페라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형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지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