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2년 9월경,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은 귀빈을 맞이할 준비로 한참 분주했습니다. 러시아 황태자인 파벨 대공과 황태자비인 마리야 표도르브나 대공비가 11월 경에 에스테르하지 궁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에스테르하지 궁에서는 요제프 하이든이 궁정 악장으로 봉직하고 있었고,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궁정 악단을 전 유럽에서 손꼽힐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연주를 하는 곳으로 만들어내어, 헝가리 내에서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군주이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훌륭한 음악을 듣고 싶다면 자신의 빈 궁정이 아닌 에스테르하지에 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을 정도였지요. 1781년 유럽 순방에 나선 러시아 황태자 부처는 주로 유럽 강대국의 궁정 위주로 방문했는데, 정략적 가치는 뒤떨어지는 헝가리 지역의 에스테르하지 궁을 일부러 방문하는 계획을 짠 것에는, 하이든 및 에스테르하지 궁정 악단의 음악적 명성 때문이었다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790년경 그려진 파벨 1세 부처의 초상화입니다. 이 둘은 훗날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와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이 당시에는 황태자와 황태자비였습니다.
하이든은 궁정 악단 총책임자로서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 작품을 새롭게 작곡하고 공연 준비를 했습니다. '러시아 4중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현악 4중주곡이 이 때 작곡되어 파벨 대공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러시아 황태자에게 헌정되었기에 러시아 4중주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사 오를란도 Orlando Paladino>라는 오페라를 축하공연으로 새롭게 작곡했고, 10월경 오페라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파벨 황태자 일행은 갑자기 예상일정을 대폭 변경했고, 이 와중에 에스테르하지 궁 방문 계획이 통째로 취소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에스테르하지에서 준비하던 파벨 황태자 일행을 환영하기 위한 갖가지 음악 공연과 행사계획은 취소되었습니다. <기사 오를란도>는 이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이내 잊혀질지도 모를 운명에 처했습니다. 당시 특정 행사를 위해 위촉된 작품은 모종의 사정으로 그 행사에서 공연되지 못하면 그냥 사장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작곡가는 그 작품의 음악을 다른 작품에 재사용하는 일은 있어도 마저 완성한 뒤 다른 장소에서 공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음악작품이란, 어디까지나 특정 행사나 목적을 위해 맞춤 주문하는 상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불행 중 다행으로, 에스테르하지 궁에서는 하이든이 새롭게 작곡하고 거의 완성한 작품을 사장시킬 의향이 딱히 없었습니다. 대신 파벨 황태자 일행의 예상방문일정 다음 달이었던 1782년 12월경,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영명축일을 기념하는 축하공연으로 초연됩니다. 영명축일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성인을 기념하는 기념일로서, 유럽 문화권에서 생일만큼 중요하거나 생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중대하게 여겨지는 기념일입니다. http://blog.daum.net/ariesia/117
이탈리아어 원제를 음차해서 <오를란도 팔라디노> 혹은 <올란도 팔라디노>라고도 불리는 하이든의 오페라 <기사 오를란도Orlando Paladin>는 기사도 문학의 대표작인 아리오스토의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소재를 가져온 작품입니다. <광란의 오를란도>는 오늘날에는 고전작품에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 키호테가 좋아하는 기사소설쯤으로나 회자되고 있습니다만, 근세 초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며 문화적 파급력도 엄청났던 작품이었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59 그리고 하이든의 오페라 <기사 오를란도>는 오를란도가 실연당하고 냅다 미쳐버려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 때려부수고 다니다가, 주변 사람들이 노력하며 마법의 힘을 동원해서 오를란도의 이성을 되찾게 해준다는 내용을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 <광란의 오를란도>에서는 지상에서 잃어버린 것은 달에 있다는 설정이어서, 동료 기사인 아스톨포가 달에 가서 오를란도의 이성을 찾아온 덕에 미쳤던 오를란도가 다시 이성을 되찾습니다. 이에 비해 <기사 오를란도>에서는 저승세계의 경계에서 흐르는 망각의 강의 강물을 오를란도가 마시게 해서, 오를란도가 이성을 되찾게 됩니다.
<기사 오를란도>에서 주인공 오를란도는 오페라가 시작하고 한참 뒤, 거의 중반 즈음은 되어야 나옵니다. 초반부에는 상냥한 시골 아가씨 에우릴라와 그 아버지인 리코네, 오를란도의 하인인 파스콸레, 마녀 알치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아름다운 공주 안젤리카, 안젤리카의 사랑을 받는 양치기 메도로 등 많은 인물들이 오를란도를 피해다녀야 한다며 분주하게 한바탕 움직입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오를란도와 만났다간, 분노한 오를란도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입니다. 예외라면 오를란도와 맞서 싸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라센 기사 로도몬테 정도인데, 로도몬테도 막상 미쳐서 날뛰는 오를란도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마녀 알치나 등 나름대로의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오를란도에게서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고 시도해 보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합니다. 등장인물 거의 전원이 피신해있는 건물 안에, 오를란도가 맨손으로 집을 부수다시피 하며 들어온 것입니다. 다행히 미리 설치되어 있던 창살에 가두는 데 성공하지만, 오를란도의 힘 앞에서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지요.
등장인물들은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 끝에 오를란도를 저승세계의 경계로 유인하다시피 데려와, 망각의 강물을 마시게 하는 데 성공합니다. 망각의 강물을 마신 오를란도는 미쳐버렸던 것을 비롯해 그에 관련된 기억 및 감정을 모두 깨끗이 잊지요. 안젤리카를 짝사랑했지만 안젤리카에게 실연당했던 것도, 실연당하자 미쳐버렸던 것도, 심지어 안젤리카에 대한 사랑하는 감정도 모두 잊고, 예전의 번듯한 기사의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한편 안젤리카와 메도로는 다시금 알콩달콩한 커플의 모습을 보여주고, 오를란도를 피해서 같이 다니다가 조금씩 정이 들었던 에우릴라와 파스콸레도 커플이 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2009년 르네 야콥스가 지휘한 <기사 오를란도> 공연에서, 알치나 역을 맡은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펜다챈스카가 'Ad un guardo, a un cenno solo 한 번의 눈길로, 한 번의 몸짓으로'를 부릅니다. 알치나가 등장하면서, 자신이 엄청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내용의 아리아입니다. 프랑스어 자막이 달려 있으며, 한글 자막은 없습니다. 현대적 연출로서, 등장인물들이 20세기의 옷을 입고 있으며, 무대소품으로 사진 등 현대발명품이 여럿 등장합니다. 이 공연에서는 한국 소프라노인 임선혜가 에우릴라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 영상은 유니텔 클래시카 채널에서 한글 자막이 첨부되어 방영된 적 있습니다만, dvd로는 아직 한글 자막 판본을 만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리아 'Ad un guardo'의 이탈리아어 원어-한국어 번역 대역 가사 대본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가사 번역 출처는 http://blog.naver.com/wolfstone/220009597029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파벨 황태자 일행에게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갑자기 유럽 순방 일정을 바꾼 것은 하이든의 <기사 오를란도>라는 작품을 사장시킬 뻔했으며, 덩달아 모차르트의 오페라 하나도 공중분해시킬 뻔했습니다. 파벨 황태자 일행은 원래 1782년 1-2월경에 오스트리아의 빈 궁정을 방문할 예정이었고, 모차르트는 그 일정에 맞추어 <후궁 탈출>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1781년 10월경, 갑자기 파벨 황태자 일행이 바로 다음 달인 11월경 빈을 방문하기로 일정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었고, <후궁 탈출>은 납기일을 맞출 수 없어 제작중단되는 처지에 놓이고 맙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작품은 대개 미완성으로 사장되기 마련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모차르트에게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만든 '국민극장'인 부르크테아터가 있었습니다. 당시 모차르트는 빈 궁정 및 상류층의 음악계에서의 입지는 미묘했지만, 독일어 음악극인 징슈필을 후원아고 공연하기 위한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극장인 부르크테아터 http://blog.daum.net/ariesia/39 공연 담당자 및 관계자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르크테아터에서는 주문자가 중단시킨 모차르트의 미완성 징슈필이 완성되면 공연하기로 결정하고, 1782년 7월 모차르트는 <후궁 탈출>을 완성해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궁 탈출>은 부르크테아터라는 장소와 요제프 2세의 국민극장 정책이 낳은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며, 징슈필의 대표작이자 모차르트의 주요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후궁 탈출>은 당시 유행했던 여러 대중적 소재가 다채롭게 뒤섞인 작품입니다. 남주인공 벨몬테와 하인 페드릴로, 해적에게 잡혀 젤림이라는 오스만 지역의 태수의 궁정에 끌려온 여주인공 콘스탄체와 하녀 블론데를 구출하고자, 건축가 행세를 하며 태수의 궁정에 들어오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태수 젤림은 콘스탄체를 노예 취급이 아니라 정중하게 대우하면서, 사랑에 빠졌으니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 말하지만, 콘스탄체는 태수의 자비로움과 관대함에는 감사하지만 자기에게는 연인이 있으므로 다른 남자의 사랑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답만을 들려줍니다. 한편 건축가 행세를 하며 잠입한 벨몬테는 콘스탄체와 재회하는 데 성공하고, 콘스탄체, 벨몬테, 페드릴로, 블론데 네 명이 모두 탈출할 계획을 짭니다. 그런데 오페라 내내 무게감만 잔뜩 잡고 실수하거나 속아넘어가기만 하지 제대로 하는 것이 없던 허당 코믹 캐릭터이던 오스민이라는 하인에게, 탈출 계획이 발각되고 맙니다. 주인공 4인방은 다시 태수 젤림 앞에 포박되는 신세가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벨몬테가 태수 젤림의 원수의 아들이라는 것까지 밝혀지지만, 태수 젤림은 관대하게 주인공 4인방을 석방하고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태수 젤림의 관대함을 칭송하는 합창이 울려퍼지면서, 오페라는 막을 내립니다.
오늘날에는 좀 생뚱맞아 보이는 줄거리지만, 18세기 말 기준으로는 인기 있는 요소로 가득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으면서도 관대하고 선량한 인물을 내세워 기독교인의 각성과 반성을 추구하는, 이른바 '선량한 이교도'라는 모티브가 널리 회자되고 있었고, 오스만 투르크풍의 문물이 터키풍이라는 이름으로 살롱 등의 문화계에서 호기심의 대상이 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리 해적단이 유럽인들을 포로로 잡아 이슬람권 국가에 노예로 팔아넘기며, 유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몸값을 주고 풀려날 수 있도록 기부금을 모으고 협상을 진행하는 단체도 있었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14 오페라 내에서 태수 젤림은 원래 유럽인이었다가 벨몬테 아버지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이슬람권에 정착했다고 설정된 인물인데, 이런 설정도 당시 소설이나 풍문 등에서 이미 등장했던 소재입니다. 오페라 내에서도 당시 유행했던, 이른바 '터키풍' 선율을 변주하는 음악이 여러 번 등장하지요.
KBS 중계석.150827.국립 오페라단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작성자 drama63
KBS 중계석.150827.국립 오페라단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작성자 drama63
2015년 국립오페라단에서 공연한 <후궁 탈출>의 공연 영상입니다.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라는 번역제로 공연되었습니다. kbs중계석 영상으로,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영상이 뜹니다. 지휘자는 안드레아스 호츠, 콘스탄체 역에 소프라노 박은주, 벨몬테 역에 테너 김기찬, 블론데 역에 소프라노 서활란, 페드릴로 역에 테너 민현기, 오스만 역에 베이스 양희준, 태수 젤림 역에 젤림 디어크 슈메딩입니다.
이처럼 파벨 황태자 부처는 하이든이 있는 에스테르하지 궁 방문 계획을 전격 취소하고, 빈에 예상보다 오래 체류하게 됩니다. 그 동안 빈 궁정에서, 파벨 황태자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오스트리아 황제와의 사이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맞서기 위한 동맹 협상을 진행합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현재 터키의 전신 격인 국가로서, 이슬람권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강대한 대제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와 오랜 숙적 관계였고, 오스만 투르크와 적대관계라는 공통점을 내세워 유럽 측과 동맹을 맺거나 우군세력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1781년 유럽 순방길에 나선 파벨 황태자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해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요제프 2세와 협정을 맺으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파벨 황태자가 빈에 머무르던 시기, 1782년 오스트리와 러시아 사이에서, 발칸 반도 및 크림 칸국 등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곳을 러시아가 새롭게 점령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협조하거나 묵인한다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며 동맹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1787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동맹 협정의 내용을 충실히 준수합니다. 러시아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은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경계할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오스만 투르크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우선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유럽 세력도, 오스트리아와 비슷하거나 더 소극적인 기조를 취했습니다. 러시아는 4년 간의 전쟁 끝에 1791년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승리했고, 유럽 국가들의 협조 내지 방관에 힘입어 오스만 투르크의 강역이었던 발칸 지역 점령지의 영유권과 흑해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동유럽 슬라브 지역에 영향력을 키우며 국제 열강 반열에 오르는 계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1787-1791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중, 주요 전장으로 손꼽히는 1788년 오차코프 성 공성전을 화가 수초돌스키 Suchodolski가 그린 작품입니다. 예술계에서 묘사된 사례가 적은 이 전쟁을 다룬, 드문 작품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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