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건이나 역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에는 거의 항상 '사실왜곡 논란'이 일어나고는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진행 과정은 거의 판박이지요. 해당 사건이나 관련 인물을 다룬 기록과 창작물의 묘사가 다를 때, 이것은 사실 왜곡 및 역사왜곡이라고 보아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창작의 자유라고 보아야 하는 걸까요.
따지고보면, 이런 논란은 비단 실화를 각색한 창작물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소설을 영상화했을 때, 원작 팬이 해당 영화나 드라마가 원작을 변형했다거나 축약했다고 불만을 가지는 일은 종종 일어나니까요. 소설에서는 멋지게 묘사된 캐릭터나 재미있는 사건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에서 형편없이 묘사되면 원작소설을 본 입장에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영화만 본 사람이 영화 내용을 비판하면서 원작소설도 같이 도매금으로 혹평하기라도 한다면 그 불만은 더욱 커질 테지요. 소설에서는 엄청나게 멋지게 묘사된 캐릭터가 영화에서는 소인배처럼 묘사되었는데, 영화만 보고 그 캐릭터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소설 팬이라면 화가 나고도 남겠지요. 이런 식의 현상이, 실화를 소재로 삼은 창작물에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소설을 요상하게 각색했을 때는 기껏해야 한 소설의 내용이 요상하게 퍼지는 일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실화 소재 창작물에서 그랬다가는 실존인물이 그 대상이 되어버리니까요.
소설을 연극,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각색할 때에는, 무조건 원작과 동일하게 구현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문장 서술이 가능한 소설과, 대본 형식의 영상화 스크립트는 다를 수밖에 없어요. 소설로는 괜찮았던 표현이 영상으로 그대로 옮기면 산만해지는 식의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을 영상 매체에 맞게 대본화하는 것이 각색 작업이고, 사실상 2차 창작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 와중에 원작의 캐릭터, 대사, 사건 진행 및 구성 등의 세부적인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영상매체에 훨씬 더 잘 들어맞게 고치려면, 거의 필연적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지요. 이 과정에서, 원작에서 비판받던 점을 반영하여 각색 수정에 참고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원작은 밋밋하거나 형편없는데, 소설을 각색한 영상작품은 호평받는 사례도 다수 있습니다. 아마 그 반대의 사례가 훨씬 더 많을 것 같지만요.
소설을 영상화할 때, 각색 담당에게 있어 원작소설은 성서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받들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드는 작품의 재료이고, 자신이 만드는 작품에 맞게 세부 내용 등은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신화나 전설을 소재로 작품을 쓰면서, 모티브만 따오고 많은 내용을 창작하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실화를 각색한 작품을 만는 창작자 중 많은 수가, 이와 비슷한 마인드로 작품을 쓸 겁니다. 소재로 삼은 실화나 역사적 사건은 어디까지나 재료에 지나지 않고, 소설을 각색해 대본으로 만들 때 으레 그렇듯이 "더 재미있을 법하게" 변형을 가하는 겁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실존인물이나 실제 사건을 대상으로 했기에 더욱 엄격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소재 작품에서 작가가 창작하거나 변형한 이야기가 인기를 끌면, 그게 실제 역사라고 착각한다는 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일단 유명세를 타고 나면, 관련 사건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는 효과도 무시할 수만은 없지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유명한 역사 소재 창작물이, 어느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별 비중이 없는 시대이고,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중국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재도 전무합니다. 삼국시대를 빼고 중국 역사를 보아도, 딱히 지장이 없을 정동예요. 하지만 <삼국지연의> 덕에 엄청나게 유명해졌지요. 권중달 번역의 <자치통감> 완역본을 예로 들면, <자치통감>은 춘추전국시대 중 전국시대의 성립에서 송나라 건국직전까지를 다룬 중국 역사서인데, 삼국시대를 다룬 대목의 책이 다른 시대를 다룬 책보다 열 배 이상 높은 판매량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기본적으로 군담소설이고, 소설적 재미를 위해 역사적 기록 대신 설화나 나관중이 창작한 내용을 집어넣은 대목이 많습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전제로 삼국시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오히려 실제 역사서 기록을 전제로 이야기하려면, "정사 삼국지 이야기"라는 식으로 따로 단서를 붙여야 할 정도지요. 이 시대의 역사적 인물을 비난하거나 칭송하면서, 실제 역사적 기록과는 동떨어진 <삼국지연의> 내용을 끄집어내는 경우는 세기 힘들 정도로 많고요.
이걸 두고 나관중이 역사왜곡했다는 식으로 비방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 역사 기록과 다르다는 이유로 <삼국지연의>를 혹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어차피 <삼국지연의>의 기존 뼈대만 유지한 뒤 세부적인 내용을 재창작한 소설이 많으니, 실제 역사기록의 내용을 반영해 <삼국지연의> 평역본을 내 보라고요. 사람들이 그 판본을 나관중 버전의 <삼국지연의>보다 재미있다고 받아들인다면, 나관중의<삼국지연의>를 밀어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요.
나관중의<삼국지연의>는 실제 역사기록과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흔히 위촉오 삼국 중 촉나라를 좋게 묘사하고 위나라와 오나라는 나쁘게 묘사했다는 식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딱히 촉나라를 미화하는 방향이 아닌데도 실제 역사와 다르게 묘사된 대목도 많습니다. 원소 아들 3형제인 원담, 원희, 원상 중 원담과 원상의 묘사는 실제 역사기록과 정반대에 가까울 정도고, 여포는 정사기록에서는 싸움은 잘 하지만 성품은 망나니 수준에 난봉꾼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탐욕스러운 면이 많이 삭제되고 전투 기량도 훨씬 유능하게 묘사되었습니다.
특히 형주 에피소드에 이르면, 나관중이 유비 편을 좋게 묘사하자는 건지 그 반대인건지 혼동이 될 정도지요. 정사기록에 따르면 형주에서 유비는 형주 군주의 후계자로 장남인 유기를 지지했는데, 차남인 유종이 온갖 모략으로 유기의 자리를 빼앗은 후, 그냥 냅다 조조군에 항복하며 형주를 들어바칩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 유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등장해서 그저 주변 사람에 휘둘리다 그리 된 것으로 묘사되고, 정사기록과 달리 유기의 친동생이 아니라 이복동생으로 설정되어서 세력다툼을 벌일 만한 나름대로의 근거도 갖춰줍니다. 상황을 보면 유종을 악랄하게 묘사할수록 유기가 긍정적인 캐릭터로 비쳐질 것이고, 자연히 유기를 지지한 유비의 정당성이 강화될 것인데도 이렇게 변형했지요. 그렇다고 바뀐 내용이, 실제 역사기록보다 딱히 극적으로 흥미진진해졌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그만큼 비중 있는 대목도 아니지만요.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실제 역사기록을 변형하면서, 정사기록을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흥미로우며 인상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냈습니다. 실제 역사 기록보다 <삼국지연의>에서 각색한 일화가 훨씬 더 유명하다는 건, 그만큼 각색된 내용이 재미있고 인상적이라는 이야기도 되니까요.
오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중신인 주유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주유는 정사기록에서는 당시까지만 해도 별 세력이 없던 유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며 동맹을 맺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사사건건 제갈량에게 열등감을 갖다가 번번이 당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삼국지연의> 기준으로는 위나라와 오나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유능하게 묘사되었지만, 작품 내에서는 '이렇게 유능한 인물도 제갈량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라는 장치처럼 쓰이고 있어요. 문제는 실제로는 유비와 동맹을 주도했던 사람을 이렇게 묘사하다 보니,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영 요상해진다는 겁니다. 정사기록에 따르면 주유가 동맹을 위해 유비 측에 제의하고 제공한 것들을, 제갈량이 지략으로 빼앗아온 것처럼 묘사되고, 이런 관계가 쭉 계속되는 것처럼 서술되니, 동맹관계인데 화기애애하기는커녕 은근히 살벌한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이 와중에 유비와 정략혼인한 손권의 누이동생은 정사기록에서는 안하무인에 대놓고 유비를 싫어한 수준인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를 사랑하고 유비에게 헌신한 것처럼 묘사되어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지요. 그렇다고 작품 내에서 주유를 깎아내리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갈량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제갈량의 계략에 번번이 넘어가는 것 외에는,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에 인품도 좋은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주유가 이런저런 계략을 성공시키는 에피소드를 여럿 창작해서 넣기도 했고요. <삼국지연의> 내에서 주유는 오나라에서 독보적으로 유능하게 묘사된 인물이며, 촉나라 이외의 인물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유능하게 그려집니다. 작품 구성 측면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주유는 엄청나게 유능한 인물이지만, 제갈량은 그런 인물도 능가한다'고 묘사할 도구 역할을 하지만요.
하지만 바로 이런 설정 때문에,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라는 명문장이 탄생할 수 있었지요. 이 문장은 아직까지도 2인자가 동시대의 1인지에 대해 통탄하는 문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며, 수없이 인용되고 패러디되고 있습니다. 난데없이 주유가 제갈량을 질투했다는 설정을 집어넣으면서 극적 짜임새는 좀 요상해졌지만, 그런 설정이 아니었으면 저 대사는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서 일명 역사왜곡을 했다는 부분의 상당수는 이런 식이고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명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를 두고,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원작훼손 수준으로 심하게 변형시켰다는 평이 많지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 3형제는 황건적을 격퇴할 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안내문 앞에서 처음 만났지만, 요시카와 에이지가 각색한 버전에서는 장비가 우연히 만난 유비를 구해주고 유비는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답례로 주면서 세 명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각색하면서, 이런 식으로 극적인 에피소드를 다수 창작해 집어넣었습니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는 나관중 버전보다 훨씬 극적이고 인상적이지만, 나관중 버전에서는 없던 이야기니 <삼국지연의>라고 할 수는 없다는 평이 많은데, 따지고보면 그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원본에서도 그랬던 것이지요. 유럽의 아서왕 전설 기사도문학이 그랬던 것처럼요. 전 개인적으로 중세유럽의 아서왕 전설에 비견할 만한 동양 문학 컨텐츠는 <삼국지연의>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다채롭게 재창작되면서 향유되고, 그 와중에 수많은 에피소드가 새로 만들어지며 캐릭터 해석이 바뀌는 등의 현상이 판박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전술했다시피, <삼국지연의>의 묘사가 실제 역사기록인 것처럼 통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실제 역사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보다 재미있다는 것과, 그게 실제 역사기록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여겨진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유명해지면서 중국 삼국시대도 덩달아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연의>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각색한 창작물"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극명한 실제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각색물로 볼지, 역사왜곡으로 대할지. 그리고, 창작물에서 각색된 이야기가 실제 역사기록보다 훨씬 유명해지고 나아가 실제 역사처럼 통용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요.
그리고 이건 비단 작가가 명확한 창작물뿐만 아니라, 일명 '일화'나 '야사' 등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라든가, 민간설화에서는 악의 화신이나 선량함 그 자체처럼 묘사된 인물이 실제 역사에서는 별달리 그런 기록이 없거나 정반대의 기록만 있는 경우처럼요. 역사를 소재로 한 유명한 "이야기"가 실제 역사와 다른데도 실제 역사보다 훨씬 유명할 경우, 많은 사람들이 더 재미있는 이야기, 더 유명한 이야기를 마냥 믿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또한 시사하는 격입니다. 여기에 정답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저 실제 역사기록은 유명한 이야기에 묘사되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별달리 어필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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