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현상으로 간주되던 것이, 오늘날에는 과학적으로 원인이 규명된 사례는 많습니다. 일례로 성 엘모의 불을 들 수 있겠네요. 성 엘모란 기독교 성인인 성 에라스무스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성 에라스무스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탄압하던 시절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내장을 뽑아내는 고문을 당하다고 순교했다는 성인으로, 배탈 난 사람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성 엘모의 불이란 배를 탔을 때 배의 돛대나 높은 막대 끝에서 작은 빛덩이가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것을 성 에라스무스의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서 성 엘모의 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성 엘모의 불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실제로도 저런 식으로, 돛대 및 막대기 끝 등에서 빛덩어리가 보이는 현상입니다.
불 밝힐 것이라고는 횃불과 촛불밖에 없던 시절, 성 엘모의 불은 갑자기 신비로운 빛이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에는 불씨가 전혀 없는 곳에 불이 나타나고, 불이 나타났는데 전혀 불타지도 않는 이 현상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었습니다. 뾰족하고 높은 물체의 끝에 전기가 방전되어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현상이며, 바다에서 뇌우가 몰아치는 날씨일 때 유난히 자주 목격되는 것도 이 원리로 설명됩니다. 이 스파크 현상은 도깨비불의 원인 중의 하나로 제시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숲 같은 곳에서 갑자기 불빛이 일어나는 도깨비불 현상은 오늘날 짐승의 시체의 인 성분이 자연적으로 발화해 빛을 낸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성 엘모의 불 같은 스파크 현상일 가능성도 종종 제기됩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물리 및 화학쪽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에서도 나타납니다.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신체현상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구체적인 질병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지요. 특히 기록의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부한 기록을 남긴 조선시대 중에서는, 당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오늘날 특정 질병을 앓았다고 강력히 추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5대 왕 문종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순빈 봉씨는 회임했다고 거짓말을 한 후 유산했다는 거짓말로 그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이 기록은 순빈 봉씨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막나가는 인물이었는지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이에 대해 오늘날에는 상상임신이었지 거짓말하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폐비 윤씨, 포악한 성정->산후우울증
조선 9대 왕 성종의 둘째 왕비이자, 10대 왕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는 원래 성종의 후궁이었습니다. 후궁 시절 현숙하고 덕망이 높으며 어른들을 공경했기에, 성종의 첫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한 이후에 둘째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왕비가 된 직후 훗날 연산군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로서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을 낳은 직후, 폐비 윤씨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납니다. 기록에 의하면, 폐비 윤씨는 아들을 낳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행동하며,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하게 행동했습니다. 아랫사람들을 험하게 다루는가 하면, 심지어 시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나 남편이자 국왕인 성종에게도 예의에 어긋난 언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적이 빌미가 되어, 무려 다음 왕이 될 아들을 낳은 왕비가 폐비되고 나중에는 사약을 받아 죽는 운명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폐비 윤씨의 성정이 포악하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후궁 시절 공손했던 것도, 어디까지나 연기였다는 식으로 치부됩니다. 그런데 현대 들어 폐비 윤씨가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견해가 나타났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갑자기 성격이 신경질적으로 바뀐 것을, 더없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이지요.
*제안대군, 사실상 백치 혹은 바보 연기->서번트 증후군
제안대군은 조선 8대 왕 예종의 아들이었지만, 예종이 승하한 후 다음 국왕으로 등극한 사람은 4살짜리였던 친아들 제안대군이 아닌 조카 성종이었습니다. 제안대군은 당대에 백치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어리석다는 평이 자자했는데, 한문으로 작문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일상행동에서도 갖가기 바보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전합니다. 그런데 왕의 조카가 왕이 되었을 때 왕의 아들이란 것은 조금만 트집을 잡혀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경계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바보 연기를 했다는 설이 널리 퍼졌습니다. 바보 연기를 했다는 설의 주요 증거로 언급되는 것이, 제안대군은 왕실 행사 등 복잡한 의례를 따라야 하는 장소에서는 의례와 예법을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기록입니다. 한문도 제대로 모르는 수준의 바보가, 복잡한 예법을 외우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제안대군에게 백치 수준으로 어리석은 행동과 복잡한 예법을 완벽히 수행했다는 것을 동시에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습니다. 제안대군이 서번트 증후군을 앓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서번트 증후군은 자폐증을 가진 사람이, 미술이나 기억력 등 한 가지 부분에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증상입니다. 바보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던 평소 행적은 자폐증 증세이고, 복잡한 예법을 완벽히 외우고 수행하는 것은 서번트 증후군 특유의 초인적인 기억력에서 비롯한다고 하면, 이 상황이 깔끔하게 설명됩니다.
*사도세자, 난폭한 불한당 혹은 누명의 희생자->조울증
사도세자는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외아들이자 22대 국왕인 정조의 아버지입니다.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굶어죽었지요. 사도세자에 대한 당대 기록을 취합하면 일관성을 찾기가 힘든데, 궁 안에서는 갖가지 난폭한 행동을 했다고 하다가, 궁 밖 백성들을 위무할 때에는 자비로운 군주의 현신처럼 행동하는가 하면, 아내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서는 시종일관 불안증세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에 대해 묘사할 때에는, 국왕 자리를 이었다간 희대의 폭군이라도 될 것같은 불한당처럼 묘사되는가 하면,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정적들이 모함했다는 식의 양극단으로 묘사되고는 합니다. 사실상 양극단의 기록이 병존하는 셈이니까, 어느 쪽 기록을 우선하느냐에 따라 묘사가 확연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미쳤으며, 그 때문에 영조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도세자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편리하고 용이한 해답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혜경궁 홍씨가 남은 사람들에게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민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관점이 많았습니다. 사도세자를 죽인 입장에서 사도세자가 미쳤다면 제거할 만한 명분이 충분할 일이었고, 세도세자를 잃어서 슬퍼하는 입장에서도 사도세자가 미쳤다면 어디까지나 불행한 것이지, 최소한 난폭한 불한당은 아니라고 확정되는 셈이었으니까요.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한중록>의 기술을 분석하면, 조울증 내지 조현병의 특징이 더없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고 합니다. 조울증 증세가 일관적이고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울증이 진지하게 질병으로 논의되고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일이라서, 18세기 인물에다 의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을 궁정 여인인 혜경궁 홍씨가 완성도 높은 거짓 관찰일지를 꾸며낼 수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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