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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의 특성 혹은 한계와 유럽 미술사의 상관관계

아리에시아 2016. 10. 15. 11:57

조각상을 만들 때는 재료의 성질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처럼 통용될 정도로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재료의 특성을 파악하여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조각한다면 더한층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재료의 단점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조각하다는 작품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돌로 조각할 때 대리석을 주로 사용한 것도 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순백색의 대리석은 미적인 측면에서 아름답다는 것이 워낙 강조되어서, 순전히 순백색의 색채 때문에 대리석을 조각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리석은 결이 치밀해서 잘 깨지지 않고 내구성도 좋은 성질을 가진 돌이라는 이유도 컸습니다. 또한 대리석에는 공기와 갓 접촉했을 때에는 꽤 부드럽지만, 공기와 오래 접촉하다 보면 표면이 단단해지는 성질도 있는데, 이것은 조각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덜 단단해서 조각하기도 쉽고, 일단 완성하면 단단해져서 보존하기 쉬운 재료니까요. 이것은 비단 유럽 조각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도나 중국 불교에서는 바위산에 수많은 석굴을 조성한 유적이 여럿 있지만, 한국에는 마애불이나 인공 석굴인 석굴암은 있어도 인도나 중국처럼 석굴 유적은 없는데, 이는 인도나 중국에는 사암 재질의 돌이 많지만 한국에는 화강암밖에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사암은 무르고 조각하기 쉬운 돌이지만, 화강암은 너무 경도가 높아서 조각하기에는 극도로 까다로운 재질인데, 이것이 사암이 많은 인도와 중국 지역에는 석굴이 있지만 화강암만 있는 한반도에는 바위산 석굴 유적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대리석도 결국에는 돌이었기에, 금속보다는 하중에 견디는 힘이 약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대리석 조각상 중에는 인물의 다리 부근에 뜬금없는 조형물을 조각해넣을 때가 많은데, 대개 이를 보완하기 위한 편법이었습니다. 특히 청동조각상을 대리석으로 모사한 작품 중에서는, 이런 구조물이 높은 빈도로 나타납니다. 청동 조각상에서는 속이 대개 비어 있었고, 청동 자체도 견고한 재질이라 두 다리만으로도 인물의 몸체 하중을 견딜 수 있었던 반면, 속이 꽉 찬 돌인 대리석으로는 바닥에 닿아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부분의 표면적이 더 넓어야만 비로소 안정되게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초상조각일 듯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초대 황제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삼은 친척이라는 것만으로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등떠밀리듯이 로마 정계에 엉겁결에 진출하게 되었지만, 로마를 안정되게 다스리는 데에 성공하며 초대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초상은 여럿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로마 시대의 공공건축물인 '프리마 포르타'가 있던 장소에서 발견된 전신조각상이 가장 유명합니다. 최초의 오리지널 작품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대리석상은 그 청동 작품을 대리석으로 모각한 것입니다. 현재는 모각된 대리석상만 남아 있고요.


이 조각상은 아우구스투스가 발바닥을 절반쯤 떼고 있는, 나름대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다리 부근에 뜬금없이 웬 아이가 등장하며, 이 아이는 부자연스러운 받침대 위에 있습니다. 이 아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에로스, 로마 신화에서는 베누스의 아들인 아모르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아우구스투스 및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일족이 베누스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상징하는 상징성은 갖추고 있습니다만, 미학적 균형미에서는 정말 뜬금없지요. 아모르 조각상은 최초의 청동상 버전에서는 없다가, 대리석으로 모각하면서 추가된 요소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두 다리만으로는 저 자세로 대리석 무게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서, 받침대 역할로 추가했다는 것입니다. 대리석 조각상 중에는 이외에도 발치에 갑옷 등의 물건이 뜬금없이 놓여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은 대리석성의 무게받침 기능을 위해 그럴싸한 구실을 덧붙여 집어넣은 경우입니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는 아우구스투스의 초상 조각입니다. 



대리석보다는 제약이 덜했지만, 청동도 재료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경을 위한 기마상 조각을 주문받은 적이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말이 앞다리를 들어올린 역동적인 자세를 계획했습니다. 현존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케치를 보면, 말이 두 앞다리를 들어올린 채 뒷다리만으로 지탱하는 형상이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청동주조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에, 기존 예술가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자세였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막상 실제로 조각 단계에 착수ㅎ한뒤에는 기존 기술로는 이 자세로 조각상의 중량을 견디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다고, 독자적인 연구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이 스케치의 자세가 레오나르도의 실제 조각 작품에 어느 정도나 반영되었는지는 자료마다 엇갈리고 있습니다만, 찰흙으로 빚은 모형을 보고 사람들이 전례 없이 역동적인 형태와 생생한 조각 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기록은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조각 기마상은 밀라노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제작이 전면 중단되었기에, 오늘날에는 스케치만 남아 있습니다. 


말의 하체를 한 그리스 신화의 괴물인 '켄타우로스'를 묘사한 조각상들을 보면, 저런 자세의 기마상이 어떻게 여겨졌을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켄타우로스 조각상은 거의 대부분 말의 배 부분에 무슨 기둥 형상의 물체가 뜬금없이 조각되어 있거든요. 대리석상에서는 예외가 없을 정도이고, 금속제 조각상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당연히 말 형상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받침대 역할로 무리하게 집어넣은 요소입니다.




조각상은 이렇듯 재료의 제한을 넘어갈 수 없는 예술 분야입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어, 그림 분야는 표현하고자 싶은 것을 거의 무제한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식의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조각보다는 정도가 덜하고 티도 덜 나지만, 회화작품에서도 물감의 재료가 회화작품의 색채나 모습에 영향을 주는 사례가 많고, 때로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유럽 명화로 손꼽히는 작품들은 대부분 풍부하고 생생한 채색의 사실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하지만 유럽 회화에서 깊이 있고 생생한 채색을 하게 된 것은 15세기 중반에 들어서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화 물감이 등장하고 난 이후입니다.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이 거의 최초의 사례이지요. 유화 물감은 기름을 용매로 사용했기에 색을 자유롭게 혼합할 수 있었고, 건조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붓질을 찬찬히 수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얀 반 에이크의 1434년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입니다. 거의 최초의 유화 작품이며, 그림 자체로도 유럽 미술사에 길이 남을 만큼 독보적인 작품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작품은 부부 이외의 모든 손님들이 벽의 볼록거울에 비치는 구성, 벗어놓은 신발과 초 하나에만 불이 켜진 샹들리에와 벽에 걸린 묵주가 종교적 상징을 뜻한다는 등, 흥미롭고 상징적인 디테일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유화 물감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많은 유럽 명화에서 표현된 풍부하고 역동적이며 생생한 채색은 볼 수 없었을 가능성이 극히 높습니다. 또다른 새로운 물감간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유화 물감 이전에 유럽 지역에서는 템페라 기법을 사용했는데, 템페라는 달걀의 노른자를 재료로 물을 섞어 별도의 색소를 입힌 물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른자와 물이 주요 재료이다 보니 금세 건조되었고, 아주 가는 붓을 사용해 조금씩 채색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색채 표현이 제한적이었습니다.


1395-1399년경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주문한 '윌턴 이폭 제단화(딥티크)'로, 템페라 작품입니다. 이폭 제단화로 번역되는 딥티크는 휴대용 성화로서, 같은 크기의 두 폭의 그림이 경첩 등으로 연결되어 평소에는 접어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병풍처럼 펼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왼쪽에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 그리고 리처드 2세를 수호하는 역할로 세례 요한과 순교왕 에드문드, 참회왕 에드워드 등 성인으로 추앙받는 잉글랜드 국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수많은 천사가 그려져 있는데, 금보다 더 비싼 청금색 광석인 라피스라줄리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찬연하고 선명한 파란색을 내고 있습니다. 



템페라는 제한요소가 많고 불편했으며, 색채감에서도 유화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화물감이 도입된 이후, 템페라 색채는 빠르게 사라집니다. 유명 화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유화 물감을 사용했으며, 오래지 않아 물감이 곧 유화물감의 동의어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템페라 기법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오늘날 기억되는 르네상스 템페라 예술가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던 보티첼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보티첼리 작품의 색채감이 동시대 다른 작가 작품의 색감을 비교하면 어딘지 윤기나는 듯한 색감에 색다르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느낌은 템페라라는 재료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보티첼리의 작품에서는 전체적으로 세부묘사 및 명암이나 색채가 어딘지 모르게 인공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거의 대놓고 풍기는데, 템페라 채색 특유의 색감이 여기서는 보티첼리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작용합니다. 보티첼리는 금속세공을 배우면서 미술계에 입문했고, 훗날 화가로 전향한 이후에도 전교한 디테일 세부묘사를 강조하며 금속세공 기법을 작품에 종종 활용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인공적인 느낌을 주는 분위기와 템페라 채색 특유의 비현실적인 느낌이 잘 어울립니다. 보티첼리 작품의 데생 윤곽선에 라파엘로같은 부드러운 색감이나 바로크 시대같은 풍부하고 역동적인 색감의 채색을 입혔다면, 오히려 어색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르네상스 시대에 유화가 도입된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물감이란 돌이나 흙 등의 재료를 빻고 기름을 혼합해 직접 만들어야 하는 재료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나 바로크 시대에는 화가 지망생이 유명한 화가의 화실에 들어간 후, 그림을 배우기 위해 돌을 빻고 물감을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했다는 내용의 일화가 많은데, 그 시대에는 정말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물감 재료값이 비싼데다 제작방법이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들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약간만 실수해도 물감의 품질이 손상이 가기 십상이어서 물감을 보관하는 것도 까다로웠습니다. 이런 이유로 물감은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만큼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런 경향은 그림을 화실이나 공동공방 등 화구가 갖춰진 실내 장소에서만 그리는 풍조로 이어졌습니다. 물감 튜브가 발명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지요.


그리고 물감 튜브가 발명되었을 무렵, 인상파가 태동합니다. 인상파라는 개념은 물감 튜브와는 무관하게, 기존 미술계가 색다른 발상으로 그린 그림을 혹평하고 비난했다는 해프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만, http://blog.daum.net/ariesia/118 물감 튜브가 없었다면 인상파 운동은 현재 역사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게 흘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인상파는 야외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그림자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모토로 한다는 식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유명한 인상파 화가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야외에서 짧은 시간 안에 색채를 담아내어 채색한다는 것은, 튜브 유화 물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감 튜브가 없었다면 다종다양한 색채의 물감을 휴대하며 원하는 색을 즉시 택하여 채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감 튜브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일시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해프닝에서 그쳤을 수도 있고, 야외에서 순간적인 모습을 담아낸다는 작품세계 외에 다른 새로운 방향의 혁신을 이끌어냈을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19세기 인상파 모습은 없었을 것입니다.



클로드 모네는 1892년을 전후해 '루앙 성당 연작'을 40여점 그렸습니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루앙 성당 풍경의 색감이 변하는 장면을 유화 그림으로 포착한 것이지요. 휴대가 간편하며 야외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그래서 실내 화실에서 준비 단계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채색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이런 기획의 연작은 의도를 구현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잡아내어 캔버스에 즉석으로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재료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높은 일이었습니다. 기존 기술을 배운 대로만 사용한다는 것은 혁신을 기피하고 구습을 답습한다는 것쯤으로 여기기 쉽습니다만, 검증된 기술만 채용하여 안전을 추구하는 행동이기도 했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런 사례였는데, 유명한 <최후의 만찬>에서는 유화물감과 템페라를 섞었다가 완성 직후부터 물감층이 벗겨지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동시대 작품 중에 독보적으로 보존 상태가 나빠서, 20세기 말에 복원 작업을 하기 전 사진에서는 윤곽선과 색채 흔적이 흐릿하게 보이는 수준이었습니다. 템페라의 용매인 물과 유화 물감의 용매인 기름이 서로 섞이지 않아 물감층이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마른 벽에다 채색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앙기아리의 전투'라는 주제로 벽화를 그렸을 때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물감을 제조할 때 실수하는 바람에 물감이 흘러내려서 그림 자체가 망가져버렸지요.


<모나리자>도 이런 사례에 해당하는데, <모나리자>를 그릴 때 나무판에 석회를 칠해 평평하게 만든 뒤 황 성분을 섞은 물감을 사용하는 바람에, 석회 성분과 황 성분이 서로 반응해 물감이 검게 변색되었습니다. <모나리자>는 현재 어두침침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색감이 어두운데,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의도가 아니라 물감이 변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두운 색감이 모나리자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는 견해도 많지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대에 공산품으로 제조되어 균질한 품질을 갖추고 간단히 이용할 수 있는 튜브 물감이 발명되었다면,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훨씬 좋은 보존상태와 생생한 색감으로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책임을 따지자면 이건 튜브 물감을 몇백년 일찍 발명되지 못한 것을 탓할 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쪽에 근본적 원인이 있겠지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전정신은 많은 새로운 시도와 괄목할 만한 결과물도 낳았지만, 물감 분야에서는 오히려 악영향으로 작용한 셈인데, 이런 것을 보면 장점과 단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특성이 상황이나 행동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납득이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