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후대의 궁전 건축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궁전은 아마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일 것입니다. 외국 왕실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대놓고 모방해 새로운 궁전을 지은 사례는 추정되는 경우까지 합치면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이며, 유럽 왕실 궁전이라면 으레 떠오르는 정교하고 화려하고 호화로운 이미지는 베르사유 궁전이 확립시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궁전인 버킹엄 궁전이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중시한다면, 베르사유 궁전은 호화롭고 화려한 분위기로 대표됩니다. 그리고 절대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나라이 궁전 건축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지요.
베르사유 궁전의 전경입니다. 베르사유 궁전 건물과, 기하학적인 도안으로 구성된 궁전 정원의 모습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벽 하나가 거의 통쨰로 거울로 장식된 거울의 방입니다. 수많은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촛불이 켜지고, 이 광경이 거울에 비쳐 일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19세기 후반에도,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건물이 지어진 사례가 있습니다. 디즈니의 성채 모양 로고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존하는 성의 모습을 모티브로 삼은 것입니다. 바로 19세기 후반 바이에른 왕국에서 건설했던 '노이슈반슈타인 성'인데요, 이 성을 지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외에도 여러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그 중에 베르사유를 거의 그대로 본딴 '헤렌킴제 궁전'이 있지요. 헤렌킴제 성은 베르사유 궁보다 규모는 작지만, 정원 구조나 분수 장식, 실내 내부 장식 등은 베르사유와 거의 흡사합니다. 당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는 건축비에 아낌없이 지출했기 때문에, 이백여년 전에 지어진 프랑스 궁전을 곧이곧대로 모방한다는 건설계획이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분수대에서 바라본 헤렌킴제 궁전 모습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베르사유 궁전과 흡사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대놓고 모방한 외국 궁전은 여럿 있지만, 헤렌킴제 성처럼 베르사유만의 호화로운 분위기를 재현해낸 궁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궁전들은 외관이나 내부 디테일 등에서 베르사유의 마이너 카피, 그러니까 원본보다 못하게 베꼈다는 게 티가 너무 납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센 왕국에서 베르사유를 모방해 지은 상수시 궁전 같은 경우는, 그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했다고 말해주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규모나 장식 디테일 등의 요소가 뒤떨어집니다.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의 모습입니다. 전 관련정보를 접하기 전에는, 상수시 궁전이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다는 취지로 착공된 궁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더랬습니다. 베르사유 궁전만의 그 정교한 호화로움과는 완전히 딴판이니까요.
당시 프로이센은 신흥 왕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였기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같은 막대한 건축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대립구도를 형성할 정도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도 베르사유 궁전과 흡사한 궁전을 새로 지으려고 했다가, 건축비가 부담스러워 이런저런 부분에서 건축비 지출울 줄였을 정도였는데, 프로이센 왕국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원본을 흡사하게 모방한다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아마 바이에른의 헤렌킴제 궁전은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것이고, 프로이센의 상수시 궁전은 낙제를 걱정해야 할 판이고, 후술할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은 합격점을 조금 넘는 정도일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지고 반 세기 후에 짓기 시작한 쇤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베르사유 궁전 같은 궁전을 짓고자 했기에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초 계획안의 건축비 지출이 과다하여 재정상 감당하기 힘들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최초 계획보다 30% 정도 축소된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건축 외벽에는 대리석 장식이나 값비싼 채색도료를 쓰지 않고, 흙에서 추출한 도료를 사용하여 채색했습니다. 이 때 쓰인 샛노란색 도료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검박하다는 이유로 애용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라고 불리게 됩니다.
쇤브룬 궁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현재 프로이센의 상수시 궁전이나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은 대표적인 문화재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데 반해, 헤렌킴제 궁전은 유네스코 등재는 고사하고 지명도도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헤렌킴제 궁전의 역사가 짧기는 하지만, 유네스코는 헤렌킴제 성이 지어질 무렵 활동하기 시작했던 근대 건축가인 가우디의 작품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선례가 있습니다. 1909년경 완성된 구엘 공원이나, 1882년 착공되어 아직까지도 건축 중이건만 미완성 상태에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등이지요.
우선 헤렌킴제 궁전은 지명도가 낮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거의 대놓고 본딴 건물이라서, 베르사유 궁전에 얼마든지 갈 수 있는 현대에는 독자적인 가치를 거의 잃어버렸지요. 원색 인쇄가 발달하자 여러 명화는 컬러 사진으로 향유되고, 명화를 판화로 옮긴 판화작품의 미술수요는 사라지게 된 것처럼요. 현재 헤렌킴제 궁전이 회자되는 경우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만든 국왕이 지은 다른 건축물이랍시고 언급되는 경우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건 헤렌킴제 궁전이 지명도가 낮은 이유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베르사유 궁전을 "원본보다 못하게 모방한" 상수시 궁전이나 쇤브룬 궁전은 유명한 이유로는 부족하겠지요.
상수시 궁전이나 쇤브룬 궁전은, 베르사유를 모방하려고 했으나 건축예산 문제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많은 요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상수시 궁전이나 쇤브룬 궁전이 지어지전 시기는 왕실을 장중하고 호화롭게 꾸미는 것이 왕실의 위상, 나아가 국가의 위상과 직결되던 시대였기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충분한 예산만 있다면 19세기 바이에른의 헤렌킴제 궁전처럼 베르사유 궁전을 그대로 본딴 궁전을 지었을 공산이 크지만, 재정 문제 때문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겁니다. 하지만 베르사유 궁전에서 많은 요소를 포기한 뒤 생겨난 빈 자리에,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요소를 채워넣는 데에는 성공했지요. 상수시 궁전은 건축장식이 거의 없는 것을 오히려 프로이센 왕실 문화 특유의 검박한 분위기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쇤브룬 궁전의 샛노란색도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채택된 도료건 말건 다른 궁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산뜻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호화롭고 정교한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오히려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무언가를 모방할 때 예산이 충분하지 않아 계획을 축소해야 했다면, 원본보다 훨씬 못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타지마할과, 적은 건축비로 타지마할을 본따 지은 비비 라 마크바라처럼요.
타지마할은 인도 건축물 중에 가장 유명한 건축물로,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황비 뭄타즈 마할을 위해 지은 영묘입니다. 하지만 타지마할 건축비로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나라가 휘청할 지경이 되었고, 종국에는 아들 아우랑제브가 쿠데타를 일으켜 샤 자한을 유폐하고 자신이 새 황제가 되지요. 하지만 막상 아우랑제브도 모친을 위해 타지마할을 본따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 무덤이 바로 비비 카 마크바라입니다. 그리고 비비 카 마크바라는, 멋진 원본을 무리하게 모방하느라 어설픈 결과물이 나오는 '마이너 카피'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지마할의 모습입니다.
비비 카 마크바라의 모습입니다.
비비 라 마크바라의 건축비는 타지마할 건축비의 40분의 1 이하였는데, 그러면서도 타지마할의 구조는 그대로 본따는 바람에, 타지마할을 빈한하게 따라했다는 인상을 팍팍 풍기는 건축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문화재 자체로서보다, 타지마할을 어설프게 따라한 건축물이나 '가난한 타지마할'이라는 별칭으로 훨씬 더 유명할 정도입니다. 최고급 대리석과 온갖 보석을 사용한 타지마할의 호화로움에 한참 뒤처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타지마할의 조화미나 균형미도 찾아볼 수 없으며, 건물을 보면 타지마할과 비교했을 때 초라하다는 생각부터 들고, 타지마할과 비교해보면 앙상한 뼈대같은 느낌마저 줍니다. 건물 자체로만 놓고 보면 못 지은 건축물은 아니고, 나름대로 장중하고 엄숙한 느낌도 있습니다만, 타지마할을 대놓고 따라했으면서 저런 결과물이 나왔으니 비교될 수밖에 없지요.
차라리 적은 건축비로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을 채택해 지었다면 최소한 타지마할과 대놓고 비교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적은 제작비로 모방하느라 속속들이 타지마할과 비교되면서 타지마할을 어정쩡하게 따라했다는 식으로 평가가 깎이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수시 궁전과 쇤브룬 궁전은 예산이 적어서 베르사유 궁전에 비해 건물 규모와 장식물 등이 뒤떨어지게 된 것을, 오히려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수이 궁전과 쇤브룬 궁전에서는 원본 격인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되어서 더한층 두드러지지만, 이외에도 재정 문제 때문에 싼 건축방법을 택한 것이 오히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영국의 켄싱턴 궁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켄싱턴 궁을 지을 당시 재정 문제 때문에 건물 외벽 건축비를 극도로 축소시키면서, 석재 외장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대신 붉은 벽돌로 외벽을 쌓는다는 공법을 채택했는데, 이 덕분에 켄싱턴 궁은 다른 영국 궁전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산뜻한 붉은 벽돌로 빈 공간을 채워넣으면서, 독특하고 색다른 분위기를 빚어애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켄싱턴 궁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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