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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린 나이에 심오한 작품을 접할 때, 내용을 오독하는 경우

아리에시아 2016. 7. 30. 11:57

전 개인적으로 축약본이나 편집본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고, 되도록 완역본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완역본이 현대 독자에게 너무 난해할 경우에는, 차라리 해설서를 보는 쪽이 축약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요. 특히 아동용 개작본의 경우에는, 완역본은 어린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여겨져서 만들어진 판본인 경우가 많은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완역본을 읽는 것이 어정쩡한 개작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예 작품의 줄거리를 차용해 동화처럼 평역하는 것이라면 이채로운 소재를 다룬 동화책 정도로 여길 수 있겠지만, 줄거리를 전달하기에 급급한 식의 개작본은 영 어정쩡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너무 어린 나이에 심오한 작품의 줄거리만 덜렁 접했다가, 내용을 단단히 오독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줄거리만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메시지를 오독해버리는 것은, 아예 작품을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전 초등학생 때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읽은 직후, 알자스가 20세기 완전히 프랑스 땅이 되었다는 걸 알고, "프란츠에게 잘 된 일이야."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73 알자스 로렌이 어떤 땅인지, 왜 그렇게 갈등이 빚어졌는지를 전혀 모르는 채, 작품의 줄거리만 이해하고 끝내버렸던 거지요. 이건 알자스가 프랑스와 독일 중 어느 쪽의 땅이어야 하는가를 따지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사극과 실제 역사를 혼동하는 수준의 문제였습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재미를 위해 세부적인 에피소드를 창작하는 것이나 한쪽 입장을 드는 것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걸 실제 역사처럼 혼동해버렸던 겁니다. 작품의 외적 배경을 모른다는 것이, 완전히 엉뚱한 감상으로 이어졌던 거지요. 어떤 의미로는, 작가 도데가 의도했던 감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작품 자체만 보았을 때에도, 너무 어릴 때 읽어서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완전히 엉뚱하게 이해해버린 경험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제가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처음 접한 것은 1954년작 미국 애니메이션을 본 것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한국어 더빙되어 TV에서 방영해 주었지요. 


국내에서 여러 번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판 동물농장입니다. 1954년작으로, 퍼블릭 도메인 작품으로 저작권이 풀려 있어 제 3자도 자유롭게 유동할 수 있기에, 유튜브 등에서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판 <동물 농장>은 결말부에 아주 약간의 추가 스토리가 덧붙은 것 외에는,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전개됩니다. 한 동물농장에서 농장주가 동물들을 착취한다고 생각하여, 동물들이 연합하여 인간 주인을 쫓아내고 동물들만의 농장을 만듭니다. 동물농장의 수많은 가축 중에서도 돼지들이 이 모든 계획을 주도했고, 이후로도 동물농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돼지를 제외한 동물들의 처우는 조금씩 열악해지기 시작하고, 반면 돼지들은 더욱 적게 일하고 더욱 배불리 먹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농장에 풍차를 짓기 시작하면서, 돼지를 제외한 동물들은 풍차 공사에 혹사당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열심히 일했던 복서라는 말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고, 돼지들은 수의사가 복서를 치료하기 위해 데려갈 것이라고 말하는데, 막상 복서를 싣고 간 차에는 도축업자 마크가 붙어있었습니다. 그 이후 복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사인은 최고의 치료를 했지만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는 것으로 공표됩니다. 그리고 돼지들은 복서가 죽은 직후 출처가 불분명한 채 생겨난 위스키를 마시며 한바탕 자기들끼리 놉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다른 동물들이 이 광경을 보고, 돼지들의 모습인지 동물들의 모습인지 인간의 모습인지 분별할 수 없더라는 문장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장면을 목격한 다른 동물들이, 돼지들이 자신들을 착취하고 돼지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결연한 표정으로 돼지들이 있는 집에 단체로 쳐들어가는 장면이 추가되었습니다.

원작소설 <동물농장>은 좁게는 공산주의 혁명을, 넓게는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입니다. 서민들을 위한답시고 기존 권력자 계층을 몰아냈지만, 서민들의 상황은 나아진 게 없이 오히려 더 나빠졌고, 모두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지만 새로운 권력자 계층이 생겨났으며, 새로운 권력자 계층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서민 계층을 가혹하게 부려먹는다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 줄거리는 러시아 혁명과 소련 사회에 거의 완벽할 정도로 들어맞으며, 비단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적 사고방식과도 절묘하게 속속들이 들어맞습니다. 


제가 이 애니메이션을 본 것은, 초등학교 1-2학년 때쯤이었습니다. 제가 미술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초등학교 3학년 이상으로는 안 올라갑니다. 미술학원을 다니던 시절인 걸 왜 이렇게 뚜렷하게 기억하냐면.... 제가 TV에서 저 애니메이션을 보고, 돼지를 제외한 동물들이 불쌍하다면서, 미술학원에서 돼지가 아닌 다른 다양한 동물들은 따뜻한 곳에서 배불리 먹고, 창문 밖에서 돼지들이 그걸 부럽다는 표정으로 빼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돼지가 나쁜 동물이라는 생각까지는 안 했던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심지어 복서가 도축업자의 차에 실려 끌려가는 장면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습니다. 작품 내에서 복서가 차에 타고 가는데, 차에 무슨 검은 마크가 붙은 걸 보고 다른 동물들이 기겁해 복서를 태운 차를 뒤쫓아 가는 걸 보고서도, 뭔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 모양인데 쟤네들이 왜 저렇게 난리피우는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동물농장>의 감상이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건 나빠."도 아니고, "<동물농장>의 돼지들은 나빠."였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을 일이지만요. 그나마 애니메이션으로 보니 저 정도라도 이해했지, 원작 소설로 봤다면 줄거리조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어린 나이에 세계명작이라는 책을 독파하는 것을 엄청난 성취로 여기면서 읽어보라고 등떠미는 사람이 제 주변에 있었고, 그런 사람 덕에 그 나이에 <동물농장>을 읽었다면, 전 <동물농장>을 못됀 돼지들이 불쌍한 동물들 괴롭히는 작품이라는 정도의 감상이나 받았을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때는 한 술 더 떴습니다. 중학생 때 도서관에서 여러 고전명작의 주요 장면을 발췌해 소개한 책을 읽었습니다. 표지 디자인도 내용의 몇몇 구절도 기억나는데, 막상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이 책에서 다른 챕터는 그럭저럭 내용을 이해했는데, <대심문관>이라는 챕터만은 내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더랬습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극중극처럼 둘째 이반이 구상한 소설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 소설인 <대심문관> 맞습니다.

<대심문관>은 크리스트교의 이름을 내세워 이단심문과 종교재판이 횡행하던 시기, 1500년 즈음의 에스파냐 세비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의 모습 그대로, 그 곳에 나타나 1500년 전에 했던 활동을 그대로 다시 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이단심문을 관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심문관이 파견되고,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와 문답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문답 장면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힙니다.

한 나라의 종교를 관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심문관은, 눈앞에 앉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신으로서 공대하기는커녕, 지금 예수가 나타나봤자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혼란만 가져준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갖가지 교리 이야기, 믿음 이야기가 잔뜩 나옵니다. 굳이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극도의 교조주의적 논리라는 정도로 정리되겠는데, 이 정도로의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있는 논담이 속출합니다.


이런 내용을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나요.... 당시의 전 1500년 즈음의 에스파냐, 그 중에서도 세비야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이단심문관, 종교재판소 등의 이미지로 통용되는 시대라는 걸, 전 전혀 몰랐던 겁니다. 심지어 대심문관이 어떤 자리인지도 몰랐어요. 하물며 중간의 문답 장면은, 무슨 이야기인지 말 그대로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해한 대목은 단 하나, 대심문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이라도 해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하듯 말하는 대목뿐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이것대로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고위 성직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데 저렇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 줄거리를 어떻게 이해했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했는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것을 안 믿고 거짓말쟁이나 정신이상자로 생각한다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문답이 끝나고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심문관에게 키스하고, 대심문관이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면서 예수를 풀어주는 장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왜 난데없이 자길 거짓말쟁이 취급한 사람에게 키스까지 베풀어주고, 대심문관은 왜 상대가 예수라고 믿지도 않으면서 순순히 내보내주냐고요.

아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저 때 읽었다면, 전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저 때 읽었다가 줄거리나 등장인물 심리 등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구성이 훨씬 복잡하고 장황한 <카라마조프의 가의 형제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리 없어요. 제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완역본을 읽은 건 대학교에 들어와서였는데, <대심문관>이 장면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이게 이런 내용이었냐고요. 아까도 언급했지만, 전 저 이야기를 "예수가 강림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못 믿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 쯤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한 살이라도 어린 나이에 유명한 작품을 독파하는 것을 굉장히 자랑거리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나이에 심오한 내용을 정녕 이해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런 독서 중 진정한 감상은 얼마나 될 것인지, 그리고 표면적으로 줄거리를 이해하는 것 이상의 감상을 하는 경우는 과연 얼마나 될지, 무엇보다 그런 것을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일일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자꾸만 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