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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과 직역-언어유희 계열 번역에서

아리에시아 2016. 11. 26. 11:58

의역이나, 직역이냐의 논란은 아마 번역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역과 의역의 우열 논란을 치열하게 벌이기보다, 같은 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번역한 뒤 독자가 선호하는 방식대로 번역한 판본을 읽는 것이 가장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작가가 사망한 지 70년이 경과하지 않아서 아직 저작권이 있는 작품일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방식이겠지요. 저작권이 있는 작품은 당연히 한 곳과 독점번역계약을 하기 때문에, 여러 방식의 번역판이 나올 수가 없고, 원어로 감상할 수 없는 사람들은 번역가를 거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특히 언어유희 계열 번역은, 번역하기가 특히 까다로운 분야 중 하나입니다. 직역으로 하면 재미없어지기 일쑤고, 의역으로 하자니 어떻게 의역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민용태 번역의 <돈 끼호떼 1, 2> 완역본으로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돈 키호테> 1, 2부의 내용을 완역한 판본이지요. 이 번역본은 완역본은 아무래도 직역 위주로 번역해서 딱딱할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등장인물들이 맛깔나는 말투로 대화하는 등 자연스러운 번역이 단연 돋보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에스파냐어의 언어유희를 자연스럽게 의역해서 옮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최대한 의역하괴, 원문을 직역한 내용 및 관련 설명을 주석으로 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산초 판사(번역본 표기는 '싼초 빤사')의 '판사'라는 이름을 발음이 비슷한 에스파냐어 단어로 착각하는 대목의 경우, 이 번역본에서는 나무판자 등에 쓰이는 '판자'라는 단어로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번역한 후, 에스파냐어 원문 단어 관련 주석을 달았지요. 이 번역본 이후, 저는 언어유희 계열 번역에서 이런 방식을 가장 선호하게 되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이건 고전 완역본이라, 주석을 달아도 독자들이 익숙했을 상황이라서 가능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현대 소설을 번역하면서, 이런 식으로 주석을 다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현대 소설을 읽는 독자들 중, 주석을 웬만하면 기피하는 비율이 높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개인적으로 고전 문학작품의 언어유희 번역 중 가장 기막히다고 꼽는 것은, <오디세이>의 '우티스' 단어 번역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는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위협하는 폴리페모스에게, 자신의 이름이 '우티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그리스어로 '아무도 아니다'를 뜻하는데, 나중에 오디세우스 일행이 폴리페모스를 무찌를 때 언어유희의 절정을 보여주게 됩니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폴리페모스를 무찌를 떄, 폴리페모스는 동료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폴리페무스가 "우티스가 나를 해치려 한다"라고 외치자, 동료들은 그 문장을 "나를 해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뜻으로 알아듣고는 이내 돌아갑니다. 이렇게 오디세우스 일행은 폴리페모스 한 명만 대적해도 되는 상황을 이끌어냈고, 마침내 폴리페모스를 무찌르고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스 로마 고전 완역본에서 단연 첫손꼽히는 천병희 완역의 경우, 1990년대 구판과 21세기 개정판에서 이 대목의 번역이 다릅니다. 구판에서는 없을 무無, 사람 인을 조합해, 무인이라는 한문 신조어를 만들어내 직역했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나는 무인이오."라는 식으로 말하고, 폴리페모스가 동료들에게 "무인이 나를 해치려 한다"라는 식으로 외치는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정판에서는, 이 이름이 '아무도아니'라고 의역되었습니다. 이 이름만 따로 뗴어 놓고 보면 종잡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문장에 넣으면 얼마나 직관적인 번역인지 잘 드러납니다. 폴리페무스가 오디세우스가 알려준 이름의 주인이 자길 해치려 한다고 외치는 대목에서, "나를 해치려는 사람은 '아무도아니'다."라는 식으로 외치는 것으로 번역되었거든요. 듣는 입장에서는, 누가 들어도 "나를 해치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아니다"라고 들렸을 문장이지요. 직역이 아니라 원뜻을 잘 살린 의역으로, 단연 손꼽을 만한 번역이었습니다. 별도의 주석이 없이도 매끄럽게 언어유희 및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날 죽이려는 자는 아무도아니다!""아무도 아니라고?"라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니까요.



단편적인 언어유희 정도라면 몰라도, 작품 전개에 나름대로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주석을 다는데, 아무래도 재미가 반감되기 마련이지요.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둘째치고, 주석 없으면 이해하기도 힘든 이야기가 되어버리니까요. 원문으로는 문맹만 아니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언어유희가, 다른 언어로 주석 없이 매끄럽게 번역하기에는 곤란한 경우도 많고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번역판에서 화성에 일어나는 지진을 화성+지진의 합성어인 '화진'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적이 있는데, 번역본으로 보면 좀 생뚱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지진의 영어단어가 earth quake이고, 앞 단어의 earth가 지구를 뜻하며, 이에 지구 대신 화성을 뜻하는 mars를 집어넣어 mars quake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요. 하지만 이건 영어 원문을 집어넣는다면 모를까, 누가 번역해도 '화진' 이상의 번역은 나오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언어유희 표현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은데, 이런 부분은 대개 원문 단어 및 단어의 뜻을 병기한 뒤, 주석처럼 설명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처리합니다. 무성의하고 간편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는 등장인물이 하이드라는 정체 불명의 인물을 찾아다니면서, "네가 hide(숨다)라면 나는 seek(찾다)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이드의 이름이 '숨기다'라는 단어인 'hide하이드'와 발음이 같다는 걸 응용한 표현이지요. "네가 숨는다면 나는 찾겠다."라는 의미를 이중으로 표현해낸 겁니다. 그런데 이걸,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로 옮길 수 있을까요? 하이드라는 이름 자체를 바꿔버리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이라, <오디세이>의 '아무도아니' 번역처럼 이름의 발음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저 대목의 번역 하나를 위해,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대목은, 잠깐 언급되는 지엽적인 디테일에 불과하니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데 이런 언어유희 방식의 표현이, 작품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특히 추리소설에서, 특정 언어의 발음과 뜻을 활용한 암호 같은 사례가 종종 있지요. 저는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 풍뎅이>를 초등학교 학급문고에 있던 1994년 고려원 미스터리 시리즈로 처음 읽었었는데, 이 책은 어린이용이어서였는지 보물 지도의 암호를 완전히 한국어에 맞춰 뜯어고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영어 단어를 이용한 원문 암호보다는 꽤 간단한 암호가 되었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훌륭한 암호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 번역했는지, 정확한 기호는 기억나지 않아도 암호 방식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10년도 더 전에 읽은 책인데도요. 원문 영어 암호의 뜻을 직역한 한글 문장을 원문으로 삼고, 암호에는 세 가지 종류의 숫자를 적었습니다. 1부터 0까지의 숫자가 있고, 숫자 위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글자가 있고, 숫자 위에 V나 * 같은 표시가 있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숫자 위에 V표시가 없는 글자는 ㅏㅑㅓㅕ순서로 모음을 뜻하고, 숫자 위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숫자는 순서대로 ㄱㄴㄷㄹ의 자음을 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글 자음은 열네 개인데 숫자는 10까지밖에 없기에, 1부터 0까지는 ㄱ부터 ㅊ까지밖에 표시할 수 없습니다. 이에 11번째부터 14번째까지의 자음 4개인 ㅋㅌㅍㅎ는 숫자 위에 * 표시를 추가한 숫자 1 2 3 4 로 표시하며, *표시가 붙은 숫자는 4까지밖에 없다는 것이 암호 풀이에서 힌트 역할을 했습니다. 숫자가 0부터 9까지였는제 1부터 0까지였는지는 가물가물하고, 정확한 기호 표시도 기억나지 않지만, 저런 방식이었다는 것은 뚜렷이 기억납니다. 초등학교 학급문고 뒤로, 제 발길이 닿는 도서관에서는 저 책이 소장된 적이 없어서,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지만요. 아동용으로 이 이상의 번역이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멋진 번역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은 이런 암호 번역은, 원문을 병기한 뒤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저 책의 번역도 아동용인데다 여러 번역본 중의 하나였기에 가능했을 가능성이 높기에, 현대 소설의 독점번역판이라면 저런 식으로 번역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지만요.



제가 본 책 중에 이런 번역이 가장 난감한 사례는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인 <Y의 비극>입니다. 여기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결정적 단서는, 둔기를 뜻하는 blunt instrument(무딘+도구)라는 단어를, blunt라는 단어를 몰라서 instrument(도구, 악기 등. 단독으로는 악기를 뜻할때 자주 쓰이는 영어 단어)라는 단어로만 이해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둔기를 뜻하는 단어를 봐 놓고, 엉뚱하게 악기를 집어듭니다. 그런데 blunt라는 단어를 모를 만한 사람이나, 맥락 상 악기가 나올 대목이 도저히 아닌데도 불구하고 단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악기를 집어들 만한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은 관련자 중 한 명밖에 없었고, 이게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되지요. 


그런데 이건, 번역하기가 너무나도 난감합니다. 게다가 범인을 추론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라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흉악한 둔기'->흉악, 둔기 등의 단어를 몰라서 '악', '기'라는 두 글자만 취합했다, 이런 식으로 번역하는 의역을 생각해봤는데, 이 역시 너무나도 억지스럽고 작위적이지만, 이 이상의 번역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더군요. 하지만 자신이 아는 단어와 모르는 단어 중 아는 단어 쪽만 이해했다는 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어도, 모르는 단어 두 개가 연달아 나오는데 단어를 글자 단위로 뜯어서 몇 글자만 조합했다는 건 훨씬 억지스럽습니다. 결국에는 영어 원문 단어를 그대로 기재한 뒤, 주석으로 설명하는 방법밖에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