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인 직역이 흔히 딱딱하거나, 원문이 쓰여진 나라 및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는 것이 약점으로 언급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단어 대 단어로,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을 반영하여 번역했을 때, 오히려 오역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경우는 의외로 별로 없습니다.
고대 로마를 비롯해 고대 유럽 세계에 대해 논하는데 corn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옥수수로 번역하는 사례는 워낙 많아서, 그렇게 번역한 책을 언급하기가 오히려 벅찰 정도입니다. corn은 오늘날에는 옥수수를 뜻하는 단어로 자주 쓰이지만, 옛날에는 밀을 뜻하는 단어로도 널리 쓰였으며, 무엇보다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절대 옥수수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가깝지요. cousin을 무조건 '사촌'으로 번역하는 사례는 워낙 많아서, 그야말로 꼽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서양권에서야 4촌 이상의 친척은 대충 친척 정도의 개념으로만 정리하니 그렇게 두루뭉수리한 표현이 통용되지만, 한국 문화권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지요. 5촌, 6촌 친척을 무조건 '4촌'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영국에서 public school을 '공립 학교'로 번역한다든가, 영국사 이야기에서 civil war를 시민전쟁으로 번역한 사례도 있습니다. 처제나 형수 등 혼인 배우자의 여성 인척을 뜻하는 sister-in-law를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해서 '법적 자매'로 번역하는 수준의 번역입니다. sister-in-law를 의붓자매쯤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차원의 번역이겠지요.
public이 사전적으로는 공립교육, 공공재 등에서의 '공공'이라는 뜻을 가진다지만, 영국 public school은 '공립학교'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어느 정보의 신분, 최소한 인맥을 가진 집안의 자제가 비싼 수업료를 내고 다니는 귀족 학교를 뜻합니다. 상류층 자제가 다니는 귀족학교에 public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공교육이라는 단어보다, 제도권 교육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퍼블릭 스쿨'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교육이란 가정교사처럼 집안에서 사적으로 가르치거나, 믿을 만한 지인에게 보내서 가르치게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며, 일반 서민은 교육받을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기에, 상류층 자제들을 가르치는 기관에 'public'이라는 단어가 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public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단어가 되었고, public school을 public->공립, school->학교라는 식으로 번역해서 '공립 학교'로 번역하면 사실상 정반대 뜻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civil war를 시민전쟁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겪었는데, civil이 '시민', war가 '전쟁'을 뜻하는 단어기에 기계적으로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한 티가 팍팍 납니다. 영국사에서 civil war란 올리버 크롬웰로 유명한 그 사건, 즉 청교도 혁명 내지 영국 내전을 뜻하는 고유명사에 가깝습니다. 예전에는 청교도 혁명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였고, 오늘날에는 영국 내전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입니다. 오페라 <청교도>에서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http://blog.daum.net/ariesia/75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려 내전이 일어났다가 결국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영국은 공화국이 되었던 결말을 맞았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시민전쟁'이라고 번역하면, 실제 역사적 사건과 동떨어진 표현이 될뿐만 아니라, 어감마저 많이 달라집니다. 현대 세계에서 통용되는 시민 개념에 들어맞는 계층이 역사적 사건에 단체행동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거의 최초인데, 영국 내전은 양상이 많이 다르게 흘러간 사건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제가 읽은 책 가운데 오역 많은 책을 두 권만 꼽아보라면 <코드 브레이커> 번역판과 <멘델레예프의 꿈> 번역판을 꼽을 겁니다. <멘델레예프의 꿈> 번역판은 위에서 언급한 civil war를 시민전쟁으로 번역했던 책이기도 한데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 헤론Heron(2천여년 전에 증기기관 원리를 적용한 장치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고대 과학자)의 영어식 표기가 Hero라는 이유로, Hero를 영웅을 뜻하는 영어단어 '히어로'로 읽어서, '알렉산드리아의 영웅'이라는 번역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문화혁명'이라고 표기하듯이, 중국에서 경극을 공연하는 극단을 '베이징 오페라단'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지요. 경극의 영어식 표현이 '베이징 오페라'인데, 베이징 오페라단이라고 하면 베이징 시에서 운영하는 오페라단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표현이 되어버립니다.
<코드 브레이커> 번역판에서 역사 관련 고유명사 및 서술은 오역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정리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독일 지역의 군주였던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1세를 각각 독일어식, 프랑스식으로 읽어야 하는 이름이건만, 각각 프랑스식, 영어식으로 읽어 샤를 5세와 프랜시스 1세라고 표기했었다지요. 차라리 둘 다 영어식 발음인 찰스, 프랜시스라고 번역했으면 통일성이라도 있었겠는데, 그런 것도 없네요.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오역 표기라면, 단연 메리 스튜어트가 펠리페 2세의 '처제'라고 쓴 것이겠지만요. 메리 스튜어트는 펠리페 2세의 두번째 아내였던 영국의 메리 튜더 여왕, 블러디 메리의 5촌 조카입니다. 차라리 메리 스튜어트를 펠리페 2세의 아내라고 썼다면 메리 스튜어트와 메리 튜더를 혼동한 것이려니 하겠는데, 아내의 5촌 조카가 졸지에 처제로 둔갑하니 참 황당했더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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