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변형한 예술

<인현왕후전>과 선량한 인현왕후, 악독한 희빈 장씨의 선악 대립구도

아리에시아 2016. 9. 10. 11:53

<인현왕후전>은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한중록>, 인목대비 김씨와 광해군 사이의 이야기를 묘사한 <계축일기>와 더불어, 고전소설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세 작품 중, 궁중 관련 묘사가 가장 빈약하고 허술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세자빈이자 국왕의 친모였던 혜경궁 홍씨는 말할 것도 없고, <계축일기>도 인목대비의 궁녀가 썼다는 것이 정설일 정도로 궁중 생활 관련 묘사는 상세하고 충실한 데에 비해서, <인현왕후전>은 궁중생활이나 궁중 예법 등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선 궁중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해도 감상에 지장이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인현왕후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명문가의 현숙한 규수이던 민씨는 국왕 숙종의 왕비로 간택되었고, 어질고 선량한 왕비로서 칭송받는 존재가 됩니다. 한편 숙종은 장씨 성을 가진 궁녀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궁녀 장씨는 국왕의 총애 덕에 2품 후궁 관직인 소의 첩지까지 받게 되지만, 오히려 더욱 큰 욕심을 부리며 왕비 자리까지 차지하려는 계략을 꾸밉니다. 그리고 장씨는 갖가지 계략을 꾸미고 인현왕후에 대해 험담한 끝에,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자신이 새 왕비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나중에야 '진실'을 깨닫고,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위시킨 뒤 장씨는 다시 후궁으로 격하시킵니다. 한때 왕비였지만 이제는 후궁인 희빈이 된 장씨는 인현왕후에 앙심을 품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이려는 계략을 꾸밉니다. 인현왕후는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그 직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 알려져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며,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결말이 됩니다.


<인현왕후전>은 고전소설 기준에서는 흥미진진하고 매끄럽게 잘 쓰인 소설입니다. 인현왕후나 희빈 장씨라는 존재의 캐릭터성이 워낙 뚜렷하고 강렬하며, 선악 구도와 줄거리 전개도 명쾌하지요. 그리고 선량한 인현왕후와 악독한 희빈 장씨의 대립구도가 유명해지게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인현왕후전>을 통해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한 사람도 많을 겁니다. <인현왕후전>에 묘사된 갖가지 계략을 꾸미는 장희빈이라는 캐릭터는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널리 회자되고 유명세를 탔으며, 대한민국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관련 영화나 드라마가 꾸준히 제작되었을 정도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인현왕후나 희빈 장씨의 모습은, <인현왕후전>과는 달랐으리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입니다. 애초에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인현왕후에 대한 죄책감만으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기둥 줄거리부터가, 실제 역사에 묘사된 숙종과는 거리가 있지요. 숙종은 서인, 남인 등으로 갈린 정국에서 수시로 당파싸움에 불붙인 뒤, 신하들끼리 내분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왕권 강화책으로 활용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환국이라고 하는데, 숙종 시대에 숙종이 일으킨 환국만 세 차례나 됩니다. 1680년의 경신환국, 1689년의 기사환국, 1694년의 기사환국입니다.


그리고 이 중 두 번의 환국이, 인현왕후 및 희빈 장씨의 처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되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서인 측 집안의 소생이었으며, 희빈 장씨는 남인 측 인물의 후원을 받고 있는 입장이었지요. 그리고 인현왕후를 폐위한 시기는 숙종이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적극 등용한 1689년 기사환국 때였으며,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중전 장씨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된 시기는 1694년 기사환국 때 남인이 숙청되고 서인이 다시 등용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숙종이 서인 대신 남인 세력을 등용하겠다는 정치적 제스처로서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같은 원리로 남인 대신 서인 세력을 등용하겠다는 상징적 행동으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인현왕후전>의 캐릭터 설정은 역사를 단순화하다 못해, 왜곡시킨 수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극도로 정형화시키며 내용을 뒤바꿔놓으며 갖가지 에피소드를 창작한 것 치고는, 의외로 <인현왕후전>에 묘사된 인물의 이름이나 대외적 행적 등은 실제 역사와 은근히 잘 들어맞습니다. 송시열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했다가 귀양가고 나중에는 사사된 일이나, 박태보다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것이나, 희빈 장씨의 아들이 인형왕후를 잘 따르고 인현왕후도 세자를 아꼈다는 것, 그리고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 자체도 일단은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물증은 빈약했고, 누가 저주했다는 이유로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죽을 리도 과학적으로는 만무하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저주설 자체가 사실무근이거나, 기껏해야 작은 꼬투리를 부풀려 과장했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현재로서는 장씨의 아들인 세자가 병을 앓자 병이 낫게 하기 위해 무속인을 불러 굿을 했다는 것을 문제삼고, 이게 엉뚱하게 비화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장희빈, 사극의 배반>이라는 책에서는 숙종이 경종이 왕이 되면 인현왕후는 정실 중전 출신 대비로서, 장희빈은 국왕의 친모로서 동등한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계획을 세웠지만, 인현왕후가 일찍 죽자 남인 세력에 힘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작정하고 장희빈을 제거했다는 식의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는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숙종이 제대로 조사해보지도 않고 기정사실처럼 밀어붙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나중에 또다른 자료가 발굴되면, 또다른 설이 등장하거나 새로운 학설이 정립될 수도 있겠지만요.


<인현왕후전>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흥미롭게 쓰인 소설이, 그 인물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얼마나 깊고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