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역사

풀랑의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와 프랑스 혁명의 성직자 공민헌장

아리에시아 2016. 8. 12. 18:54

1957년 초연된, 풀랑의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Les Dialogues des Carmelites>는 20세기 프랑스 오페라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현대 오페라가 대개 그렇듯이, 아리아와 대사 부분으로 나뉜 구조가 아니라, 오케스트라 선율 속에 가창을 녹여넣는 형식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의 여주인공인 귀족 아가씨 블랑슈가, 무대에 첫등장하자마자 가족들에게 수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카르멜회 수녀회에 들어간 블랑슈는 콩스탕스 수녀를 비롯해 동료 수녀들과 같이 살아가면서, 신실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막이 끝나기 전에 수녀원장이 임종하고, 수녀들은 수녀원장의 임종을 지키며 장례식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수녀원장이 제대로 취임하기도 전에, 블랑슈와 수녀 일행의 신실한 일상은 깨어지고 맙니다. 바깥에서, 앞으로 이 수녀원에서 미사를 비롯한 종교의례를 자체적으로 치르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불응하자, 정부에서 수녀원의 건물과 재산을 압류하고 수녀들은 사실상 추방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녀들은 수녀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으로 수녀원에서 퇴거당합니다.


블랑슈를 비롯해 카르멜회 수녀들은 이 일련의 명령에 따르는 대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기로 서약합니다. 블랑슈는 여러 상황이 겹쳐 그 자리에 불참한 상태에서, 수녀들은 단체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은 14명의 수녀들이 한 명씩 처형당하는 모습을, 처연하게 묘사합니다. 수녀들이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는 성가Salve Regina를 부르는 동안,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한 명씩 목소리가 사라지며, 끝에는 블랑슈와 친했던 콩스탕스 수녀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콩스탕스가 처형되는 순간, 블랑슈는 수녀들이 불렀던 그 성가를 마저 부르면서, 처형장에 스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블랑슈도 수녀들의 뒤를 따라 처형되어, 처형대 위에는 아무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 장면으로 오페라는 막을 내립니다.


다그마르 슐렌베르거가 블랑슈 역을 맡은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공연에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만, 경건하게 성가를 부르는 장면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자막이 없어도 내용을 감상하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블랑슈는 그저 신실하게 수녀 생활을 하고자 했으나, 바깥 상황은 그녀에게 그때까지 믿던 것을 부정하기를 강요했고, 그녀는 결국 부정하고 살아남기보다 믿음을 가지고 처형대에 오르기를 택했습니다. 블랑슈가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 곳은 1789년의 프랑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녀원장이 임종한 것은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1790년경입니다. 블랑슈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때에 수녀가 되었고, 그 때의 수녀원장은 '성직자 공민헌장'이 반포되던 즈음 임종하게 된 것입니다.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에서 묘사되었듯이,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는 성직자에게 종교가 아닌 새로운 혁명 정부의 방침을 따르라는 명령이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직자 공민헌장'입니다. 이 공민헌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일례로 카르멜회 수녀들이 단체로 성직자 공민헌장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집단 처형된 적이 있으며,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오페라가 작곡되었습니다. 



1790년,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카미유 데물랭은 '성직자 공민헌장'을 발의하고, 이 헌장은 7월 12일 정식으로 의회에서 승인됩니다. 성직자 공민헌장은 성직자 기본법, 혹은 성직자 선서 등으로 번역되나, 이 글에서는 성직자 공민헌장이라는 번역을 채택했습니다. 성직자 공민헌장의 내용인즉슨, 성직자를 프랑스 혁명 정부에 예속시키고 성직자는 정부의 명령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자를 임명받는 것도 정부 주도의 선거에서 뽑힌 뒤 종교보다 공민헌장에 먼저 충성하겠다는 선서를 해야만 가능했으며, 그 외에도 여타 종교적 절차는 철저하게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성직자들은 성직자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때로는 목숨마저도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로 대놓고 내몰렸습니다.


프랑스 혁명 직전의 구 체제, '앙시앵 레짐'이 1신분, 2신분, 3신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중 시민 계급은 3신분에 해당하고, 1신분과 2신분이 3신분을 착취한다는 이미지는 널리 퍼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2신분이 귀족이고, 1신분이 성직자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에는 귀족 출신이 성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빈약한 가문 출신이어도 높은 성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도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는 국사에 관여하는 경우도 많았지요. <삼총사>로 유명한 리슐리외가 추기경이었던 것처럼요. 프랑스 혁명 정부가 성직자를 제어하려는 법안을 만든 것도, 이 문제를 의식한 것에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궁정 사회에서 활동하는 고위 성직자 일부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고, 마을의 성당이나 수도원, 수녀원 등에 정착해 오랫동안 종교활동 및 마을 사람들에 대한 자선활동을 하며, 검소하고 신실한 생활을 하는 성직자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신실하고 소박한 종교활동을 하는 성직자들도, 성직자 공민헌장을 따르고 세속 정부에 복종하도록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직전 프랑스의 사회 구조를 풍자한, 유명한 풍자화입니다. 3신분의 시민이 1신분의 성직자와 2신분의 귀족을 부양하느라, 허리가 굽은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에서는 정부가 수녀원 건물을 압류하고 정부에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은 수녀들을 쫓아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성직자 공민헌장 전후의 실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장면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해인 1789년이 미처 저물기도 전에, 프랑스 성당 및 수도원과 수녀원의 재산은 모두 프랑스 혁명정부에게 귀속된다는 법령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790년에는, 아예 종교적 활동 자체를 정부가 통제해야 한다는 조치가 내려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이 공민헌장을 세속권력에 종교적 믿음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여기며 거부했고, 1년여가 지나도록 성직자 공민헌장을 받아들인 성직자는 전체의 3분의 1 남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성직자가 성직자 공민헌장을 거부한 것을 혁명에 대한 거부이자 도전으로 간주했고, 공민헌장을 거부한 성직자에게는 혹독한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종교시설의 재산 일체를 몰수했고, 수도사와 수녀를 강제로 환속시키면서 오히려 해방자 역할을 자처하며 생색내기도 했습니다. 1792년 9월의 일명 '9월 학살'을 비롯해 성직자 공민헌장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종교인과 신도가 떼죽음당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습니다. 당시 프랑스 민중 계층에서는 카톨릭 신앙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고, 평판 좋은 동네 신부님 수녀님이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것만으로도 반감을 가질 사람도 많았습니다. 공민헌장 거부자에 대한 탄압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고, 이런 경향은 방데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성직자 공민헌장 직후의 종교 시설의 상황을, 혁명 정부 입장에서 묘사한 그림입니다.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수녀원에서 내쫓긴 것을, 수도사와 수녀들이 '종교적 억압'에서 해방되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9월 학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1792년 9월 경, 프랑스 혁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귀족 및 구체제 옹호자들이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이 바로 9월 학살입니다. 그리고 이 학살에는, 성직자 공민헌장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감된 성직자도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방데 내전을 묘사한 후대의 스테인드 글라스입니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인지라 나름대로 서정적인 화풍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학살에 내몰린 희생자들의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방데 지역에서는 성직자 공민헌장 갈등으로 성직자들이 탄압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감이 점차 퍼지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 정부가 징집령을 내리자 혁명에 반대하며 시민들이 봉기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정부는 방데의 봉기를 무력진압하고,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봉기 가담자는 말할 것도 없고, 건장한 성인 남성뿐만 아니라 노약자들도 마구 죽였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아이와 어머니를 학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의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봉기 진압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보이는 사람을 마구 죽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쓴 기록이 여럿 전해오지요. 방데 내전 이전의 방데 인구는 80만 남짓이었으나, 방데 내전 직후에 집계되었을 때에는 40만명 정도였습니다. 줄어든 인구 중 태반은 방데 지역을 떠나 유랑민 신세를 자처한 생존자들일 것으로 추정되나, 직접적으로 학살당한 사망자는 최소 만 단위로 추정되며, 10만명 남짓이 살해당했다고 추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이념만을 앞세운 나머지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너무 급진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바람에, 오히려 혼란을 불러온 경우가 많았는데, 성직자 공민헌장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했으며, 평소에 종교 행사에 성실하게 참여하며 동네 성직자들을 존경하던 시민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혁명 자체에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