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는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여럿 작곡했는데,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I vespri Siciliani>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은 이탈리아의 팔레르모로,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입니다. 현재 시칠리아 지역은 프랑스 세력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로서, 오페라 초반부에 손꼽히는 시칠리아 명문가 태생인 여주인공 엘레나 공녀에게 프랑스 군인들이 짖궂게 굴어도 엘레나 일행은 꾹 참을 수밖에 없는 장면을 통해, 이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요. 여주인공 엘레나의 오라버니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다가 희생되었으며, 남주인공 아리고를 비롯해 여러 시칠리아인은 서로 힘을 모아 프랑스 세력을 물리칠 방도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레나와 아리고는 프랑스 세력을 물리치면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구체적인 대항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현재 시칠리아에 주재하는 프랑스 세력의 총책임자는 몽포르테 총독입니다. 그리고 몽포르테는 시칠리아 저항군의 중심인줄 중 한 명인 아리고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리고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데, 아리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한편 시칠리아 저항조직에서는 조만간 열릴 무도회에서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동료인 아리고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아리고는 번민을 거듭하다가, 막판에 몽포르테에게 암살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되고, 암살 계획은 실패하고 아리고의 동료들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몽포르테 총독은 아리고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린 뒤, 아리고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아리고의 동료들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아리고는 거부하려 했지만, 동료들이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을 보자, 마침내 몽포르테를 아버지라고 부르죠. 몽포르테 총독은 기뻐하면서, 엘레나 공녀와 자신의 아들 아리고의 결혼을 선포하며, 시칠리아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아리고와 엘레나의 결혼식 날, 엘레나는 아리고와 결혼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은 "고맙습니다, 여러분 Merce, dilette amiche " 아리아로, 결혼을 축하하며 꽃다발을 선물한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내용인데, 이 아리아가 바로 이 장면에서 여주인공 엘레나가 부르는 노래지요. 볼레로풍의 멜로디로 진행되는 노래기에, 볼레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엘레나와 아리고의 동료들은 이 결혼식을 기회로 삼아, 총독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결혼식에 모인 프랑스 세력을 일망타진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실행되고, 결혼식 종소리를 신호로 시칠리아인들은 결혼식장에서 프랑스인 세력을 습격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으로 오페라는 끝이 납니다. 대본에는 몽포르테 총독, 아리고, 엘레나 공녀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2012년 4회 오페라대상 수상자 음악회에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을 부르는 영상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이탈리아어-한국어 번역 대역 대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이 오페라는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카톨릭 문화권에서는 저녁 기도 시간이 따로 있으며, 이 저녁 기도 시간 때 교회의 종탑에서 종을 울리는데, 이 종소리를 삼아 벌어진 사건이지요. 이 사건이 민중들을 압제하는 외부 세력에 민중들이 대항헤 봉기한 사건쯤으로만 알려진 경우가 은근히 많은데,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연원을 지니고 있으며, 이후 이탈리아 역사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13세기 중반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중 남부는 시칠리아 왕국으로 불렸으며,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사람이 국왕으로 있었습니다. 그헌데 교황과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대립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의 상황이 요동치게 됩니다. 교황이 호엔슈티우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아니라 프랑스 앙주 지역의 영주였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의 주인이라고 사실상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호엔슈타우펜 세력과 앙주 세력이 시칠리아 왕위를 두고 전쟁을 벌였고, 앙주 세력이 이김으로써, 당시 앙주 백작이었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카를로 1세로 대관합니다. 카를로와 샤를은 같은 이름으로서, 카를로가 이탈리아식, 샤를이 프랑스식 발음입니다.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를 가혹하게 통치했습니다. 시칠리아인들은 이전보다 높은 세금을 내야 했고, 요직에는 시칠리아인들이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시칠리아에 도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수준의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는 갈수록 불만이 높아졌으며, 여기에 카를로 1세를 견제하던 외부 세력이 시칠리아인을 은근히 돕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침내 대대적인 봉기가 계획됩니다. 1282년 3월 30일 성당의 저녁 종소리를 신호로, 프랑스 세력을 일제히 제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성공했고, 시칠리아인 봉기 세력은 카를로 1세를 비롯한 프랑스인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시칠리아인들은 스스로를 외국인 국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민으로 선포하지요. 당시 이탈리아 지역의 도시국가 중에는 시민들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독립된 국가가 여럿 있었기에, 시칠리아도 그런 도시국가가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민국가가 되겠다고 선포한 것만으로는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데다가, 시칠리아의 자체적인 무력은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빈약하다는 현실론이 겹쳐져,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외국 세력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쪽을 택합니다. 당시 아라곤 국왕이었던 페드로 3세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공주를 아내로 맞았기에 원칙적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이 있었으며, 카를로 1세에 대항하는 시칠리아 봉기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제안한 것이지요. 페드로 3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시칠리아 왕국의 새로운 국왕이 되었고, 이후 20여년에 걸쳐 프랑스 앙주 세력과 아라곤 세력이 시칠리아에서 내전을 벌이게 됩니다.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작된 내전은 20년이 지난 1302년에야 마침내 끝납니다. 시칠리아 왕국은 본래 시칠리아 지역 외에도 다른 여러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시칠리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프랑스 세력이 점유하는 대신, 프랑스 세력은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조건이었지요. 이 때 시칠리아 왕국에서 떨어져 나가 프랑스 세력이 가지게 된 지역이 훗날 나폴리 왕국의 모태가 되었고, 이탈리아는 19세기에 통합될 때까지 수백년 동안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이 각각 존재하게 됩니다.
프란체스코 아예스가 1846년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소재로 그린 작품입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는 어쩌면 작품 자체보다, 작품 외적인 측면에서 더욱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자체는 오페라 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히는 베르디의 작품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까지 회자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 오페라의 설정과 전개가 진부한 건 둘째치더라도, 음악 쪽의 평가나 인기가 신통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을 제외하면 콘서트 등에서 불리는 아리아도 딱히 없고, 중창이나 합창 중에서도 별달리 유명세를 탄 장면은 없지요.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건과 워낙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소재를 다룬 오페라인만큼, 이 사건을 모르는 외국인 청중에게는 더더욱 와닿지 않게 되고요. 20세기까지만 해도, 이 작품은 이탈리아 밖에서는 거의 공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대본은 원래 <사랑의 묘약>,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돈 파스콸레> 등을 쓴 도니제티를 위해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도니제티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인 <알바 공작>의 대본이었지요. <알바 공작>은 에스파냐 세력이 플랑드르 지역을 다스리던 시절, 플랑드르 봉기를 소재로 삼은 오페라로, 내용은 <시칠리아의 저녁기도>와 대동소이합니다. 하지만 도니제티는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 이 대본은 배경 설정을 약간 손질한 채 베르디에게 가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파냐 대 플랑드르의 이야기가, 프랑스 대 시칠리아의 이야기로 변모합니다. 접점이 없던 베르디와 도니제티와 인연이 닿는 이야기인데다가, 원래 대본은 베르디의 <돈 카를로>와 배경이 겹치는 이야기라는 것이 묘합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중 드물게 이탈리아가 아닌 나라에서 초연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초연 장소가 다름아닌 프랑스의 파리였지요.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초연 청중들은 이 작품을 감상하고 냉랭하게 반응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작품이 전체적으로 평작 수준이라는 것 못지 않게, 초연 장소도 이 냉랭한 반응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총독은 인품이 괜찮은 캐릭터로 나온다지만, 총독 이외의 프랑스인은 악역을 맡고 있는데다가, 역사적으로도 프랑스 세력이 축출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프랑스에서 공연한 셈이니까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페라 공연에서는 지역 청중의 기호에 맞춰 배경, 악역 설정 등을 바꾸는 일이 자주 있었고, 아예 작곡가가 공연장소에 맞춰 바뀐 설정에 따라 음악을 개정하기도 했는데, 베르디는 이런 풍조를 지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초연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19세기 오페라 공연은 대중흥행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예술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기획이 통과되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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