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역사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와 미국 골드 러시 시대

아리에시아 2016. 7. 23. 11:56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는 1850년 즈음 미국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한 오페라입니다. 1910년 미국에서 초연되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으며, <토스카>, <라 보엠>, <나비 부인>, <투란도트> 등의 푸치니 대표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준수한 인기와 평을 얻고 있는 작품입니다.


<서부의 아가씨>는 작품 자체로는 좀 밋밋하고 미묘한 점이 많지만, 작품 외적인 측면, 특히 문화적 의의에서는 많은 이야기거리를 지닌 작품이기도 합니다. 감미로운 선율이 장기이던 푸치니는 <서부의 아가씨>에서 마냥 감미롭기만 한 선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고, <서부의 아가씨>에서의 결과물은 미묘하지만, 이 작품에서 푸치니의 실험은 뒷날 작곡한 <투란도트>의 독특한 음악세계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또한 <서부의 아가씨>는 유럽의 유명 예술가가 미국을 소재로 삼아 창작한 거의 최초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서부극' 중에서도 초창기의 작품이며, 막대한 자본이 대대적으로 투자된 작품 중에서는 최초로 19세기 중반 미국 서부 시대를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는 작품 자체로서보다는 유명 작곡가인 푸치니의 작품 중 하나로 언급되는 경향이 강합니다만, 푸치니의 이름이 아니었어도 미국 서부극 문화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첫머리에 언급될 만한 작품인 것이지요. <서부의 아가씨>가 유난히 미국에서 자주 공연되고 인기가 많은 것도, 이런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테고요.



<서부의 아가씨>는 황량하고 거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1850년 즈음의 캘리포니아로서, 폴카라는 이름의 술집에서 한바탕 시끌시끌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페라의 막이 오릅니다. 폴카의 주인은 미니라는 아가씨로, 다소 거칠게 보일 정도로 강단있고 주체적인 면이 강한 여성입니다. 난폭한 언사와 고성이 종종 오가는 술집을 여자 혼자서 탈없이 꾸려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읽지 못하는 술집 손님에게 글을 대신 읽어주는 등 많은 도움도 주고 있습니다. 폴카의 주 고객은 근처 금광의 광부들인데, 광부들은 자신들이 캔 금을 미니에게 맡겨 보관할 정도로 미니를 신뢰하고 있지요.


어느 날, 미니의 술집에 존슨이라는 낯선 사람이 손님으로 옵니다. 이방인이 등장하자 손님들은 은근히 경계하지만, 미니는 예전에 자신이 존슨을 본 적 있으니 신원보증인 역할을 맡겠다면서 존슨이 술집에 들어올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미니와 존슨은 점차 조금씩 서로에게 이끌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존슨이 유명한 산적이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자, 둘의 사이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존슨은 현재 절도에 살인강도로 수배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존슨이 그런 잔학무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미니는 존슨을 살려주고 도피시키려고 애쓰지만, 존슨은 결국 잡히고 맙니다. 사람들은 붙잡힌 존슨에게 교수형을 시키기로 결정하고, 존슨은 미니에게는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멀리 떠난 것이라고 속여달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형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미니가 나타나, 자신이 존슨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리고 존슨을 구명해달라 부탁하지요. 미니의 청원은 받아들여져, 존슨은 미니와 그 마을을 떠나가게 되면서 오페라가 막을 내립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공연된 <서부의 아가씨> 공연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여주인공 미니 역에 소프라노 바바라 다니엘스, 남주인공 존슨 역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입니다. 



<서부의 아가씨는> 1850년 즈음의 캘리포니아라는 시대적 배경이, 오페라 내용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1850년대 미국, 그것도 캘리포니아 지역이라는 점을 빼놓으면 좀 황당무계한 구석이 많은데, 이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감상하면 구멍으로 보이던 것들이 메워지며 설명이 되는 식이지요.



1850년 즈음의 캘리포니아는 이른바 골드 러시 시대였습니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미국 전역에 전해졌고, 미국 전역에서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캘리포니아로 찾아와 금을 찾기 위해 광산에 들어가거나 땅을 캐며 광부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포티 나이너 forty niner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49년의 사람들' 정도의 뜻입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민요 <클레멘타인>도 원래의 영어 가사 버전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한국에서 번안된 버전에서는 어부와 딸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영어 원전에서는 '포티 나이너 한 명과 딸 클레멘타인이라고 나오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아 몰려들었지만, 막상 금을 찾아 부자가 된 경우는 극소수였습니다. 금을 캐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금을 캔 경우에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여비 정도나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금을 찾으면 찾는 대로, 술집 등에서 탕진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 전체에서 이런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으니,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지역에서는 금을 찾아 무작정 캘리포니아로 찾아온 광부들을 상대로 한 갖가지 장사가 성업했고, 이것이 허허벌판이어던 캘리포니아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형성된 계기였다는 것입니다. 광부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도시 상업의 시작이 되었고, 계속 금을 찾기 위해서든 돌아가고 싶어도 여비가 없어서든 캘리포니아에 눌러앉게 된 사람들이 도시의 주민이 된 것이지요.



<서부의 아가씨>에서 술집 폴카의 손님들과 폴카의 주인 미니는 18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상당히 거칠게 묘사됩니다. 골드 러시 시대보다 10여년 후인 미국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작은 아씨들> 등의 미국소설과 비교해보면, 이런 점이 더욱 두드러지지요. 19세기 서양은 조신한 요조숙녀 유형의 여성상이 추구되던 시대였고, 1850년대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850년대 미국 동부 기준으로도, 미니는 남자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히 할 말 다하는 여성이다 못해 상스럽게 보일 유형의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골드 러시 시대 광부들과 그 광부들에게 술을 파는 장소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시대 고증에 맞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오페라 초반부에는 다짜고짜 고향에 가고 싶지만 여비가 없어 갈 수 없다고 슬퍼하는 사람을 보자, 주변에 있던 광부들이 십시일반으로 즉석 모금해 여비를 마련해 주는 장면도 있지요. 이렇게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이런 미담의 실제 사례가 없지는 않았던 듯하며, 고향에 가고 싶지만 여비가 없어 가지 못하는 사례는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광부들에게 나름대로 인정받는 미니가 광부들에게 신문이나 편지 등을 읽어주는 모습도, 185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났을 풍경이고요. 그 시대에는 아직 문맹이 많았는데, 아무런 기반도 재산도 없이 무작정 자기 몸과 막연한 운만 믿고 무일푼으로 금을 찾으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남주인공 존슨에 대한 설정 및 전개는, 미니와는 다른 의미에서 1850년대 캘리포니아의 문화적 배경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흘러들어온 이방인이 극악한 범죄자였다는 말에 분노한 사람들을 자기들끼리 의논해 존슨을 교수형시키기로 결정하는데, 정식 재판 절차가 진행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끼리 쑥덕이면서 의견이 대충 들어맞으면 판결이 내려진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런 식으로 민간 '재판'이 진행되는 일은, 골드 러시 시대에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보안관이 활발하게 활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일종의 자경단이 큰 역할을 했는데, 이러다보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뭉친 사람들끼리 자체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지요. 법이 없는 무법천지에서 그나마 힘이 있는 사람들끼리 뭉치면서, 자기들끼리 법을 집행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기껏 존슨에게 교수형 선고를 내려 놓고, 인망 있고 인기 좋던 술집 주인 미니가 자비를 호소하자 풀어주자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결말도 매끄럽게 연결됩니다. 사람들의 감정에만 기반해 내려진 결정이라면, 사람들의 감정만으로도 번복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