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역사

도니제티의 <연대의 딸>, 근대 유럽의 군대와 아이들

아리에시아 2016. 2. 20. 11:58

도니제티의 <연대의 딸>은 한 연대에서 버려진 듯한 여자아이를 주워 길렀는데, 그 여자아이가 자라서 근처 청년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줄거리의 오페라 코미크입니다. 여주인공 마리는 어릴 떄부터 자기를 키워준 연대를 집이자 가족처럼 생각하고 자랐으며, 마리가 어릴 적 잃어버린 자신의 조카라는 여성이 나타나자 친부모를 찾은 것을 기뻐하기보다, 연대와 연대의 군인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훨씬 더 슬퍼하는 캐릭터입니다. 오페라 내에서 마리는 가족을 찾게 된 직후 연대의 군인들에게 작별하는 노래인 '안녕히 계세요 Il faut partir" 아리아를 부르니까요. 이 아리아만 들으면 고아가 친부모를 찾게 된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팔려가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로, 처량하고 애처로운 멜로디의 노래입니다.

 

2007년 빈 공연에서 마리 역의 나탈리 드세이가 "안녕히 계세요"를 부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안녕히 계세요"의 프랑스어 원어-한국어 번역 대역 대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마리의 귀족의 친딸로 밝혀지지만, 마리는 귀족식 교육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귀족 아가씨에게 어울릴 법한 노래를 가르쳐주려고 하면, 어느새 군가를 부르고 있는 식이지요. 그리고 마리와 사랑하는 사이인 토니오와의 사이도, 토니오가 기껏해야 평민 신분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마리는 서글픈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처지가 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희극인 오페라 코미크는 언제나 해피엔딩인 법, 연대의 군인들과 토니오가 마리 앞에 나타나면서 토니오가 마리에게 사랑 고백을 하자, 마리의 친어머니는 둘의 사이를 인정하면서 해피엔딩이 됩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상태의 마리가 군가를 듣자마자 생기가 돌아오고, 토니오가 나타나자마자 기뻐하는 장면의 음악이 정말 인상적이지요.

 

 

마리는 부유하고 높은 작위를 가진 집안의 딸이었고, 신분을 되찾게 된 뒤에는 연대에서의 환경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는 친부모를 찾게 된 것을 이전에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과 이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오히려 이전보다 불행해하는 상황이 됩니다. 어릴 때부터 연대의 군인들과 함께 지낸 마리는 연대를 집이자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군 부대에서 아이를 기른다는 발상은 현대 관점에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로 비칠 겁니다. 군인은 아이를 키우는 일을 맡기에 적합한 직업이 아니며, 군대는 아이가 지내기에 적합한 장소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 오페라의 무대가 되는 19세기까지만 해도, 군대에서 어린아이가 일행으로 끼여 있는 것은 결코 생소한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종의 관례나 전통에 훨씬 더 가까웠지요. 짧게 잡아도 고대 로마 시절부터, 군 부대 주변에서 군인의 가족이 지내면서, 여자와 아이들이 군 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유럽 역사상 군대에서 성장한 인물 중 가장 유명할 로마 제국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초상조각입니다. 칼리굴라는 본명이 아니라 일종의 별멍으로, 로마 군대의 군화인 칼리가에서 유래한 애칭입니다. 칼리굴라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는 장군으로 지내면서 가족과 함께 살았고, 어린 칼리굴라는 군대에서 자랐으며 군대의 귀염둥이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연대의 딸>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유럽에서도, 군 부대 주변에 군인의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의 군인은 직업군인 제도에 가까웠는데, 한 번 군인이 되면 은퇴할 때까지 군인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한 번 특정 부대에 소속되면 소속이 바뀌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군인의 가족은 자연스럽게 군대 부대 근처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한 번 정해진 위치가 바뀔 일도 없으니, 아내와 아이들 입장에서는 가장이 있는 곳과 가까이에서 지내는 것이 여러 모로 나은 길이었으니까요.

 

심지어 군대가 전쟁 등으로 차출되어 이동할 때에도 군대와 함께 행동하기를 희망하는 가족들이 많았습니다. 군대 측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대동하면 행군속도가 느려지는 등 불리한 점이 많았기에 갖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이런 시도를 제약하려 했습니다만, 부대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워낙 많고 그 정도도 완강했기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군인이 이동해 한 번 헤어지면, 생환할 때까지 사실상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는데, 아내와 아이들 입장에서는 가장과 오랫동안 기약 없이 헤어지기보다는 위험한 전쟁터에 따라다니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연대의 딸>처럼 군 부대에서 갓난아이를 발견했을 때, 그 아이를 키워주는 경우도 있었을지는 뚜렷한 기록이 없습니다. 군 부대를 따라나니던 군인의 가족들이 그 아이를 키워줬을 수도 있고, 그냥 고아원 같은 시설에 보냈을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공식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10살 정도의 아이가 군대 일을 돕겠다면서 찾아오면 군대에서 내쫓지는 않고, 심부름꾼이나 북치기 담당 정도의 일을 맡기며 군대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는 경우는 많았다고 합니다. <연대의 딸> 공연에서는 여주인공 마리가 북을 치면서 군인 동료들의 사기를 돋워주는 듯한 연출이 자주 들어가고는 하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과 맞닿아 있는 연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