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역사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과 바르바리 해적단

아리에시아 2014. 1. 24. 18:48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은 모차르트가 스물여섯 살 되던 1781년에 작곡한 작품입니다.

 

<후궁 탈출>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음악 자체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여주인공 콘스탄체의 아리아 "어떤 고문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Martern aller Arten"는 화려한 노래로 유명합니다. <밤의 여왕> 아리아와 엇비슷하거나 더 부르기 어려운 노래를 10분 가까이 부르는 노래이지요. 그 외에도 화려하고 현란한 멜로디가 그야말로 줄줄이 나오는 작품입니다.

 

 

칼 뵘이 지휘한 1980년 뮌헨 공연에서의 "어떤 고문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장면으로,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여주인공 콘스탄체 역의 소프라노는 에디타 그루베로바입니다.

 

독일어 원어-한글 번역본 대역 가사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출처는 <어떤 고문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아리아를 소개한 네이버캐스트입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6&contents_id=3296

 

 

<후궁 탈출>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습니다. 남주인공 벨몬테는 약혼녀 콘스탄체가 해적에게 잡혀 파샤 셀림의 후궁에 노예로 팔렸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벨몬테는 콘스탄체를 구하기 위해, 건축가로 위장해 파샤 셀림에게 고용되어 후궁 건물에 들어갑니다. 한편 콘스탄체를 사들인 파샤 셀림은 콘스탄체를 사랑하게 되었고, 노예랍시고 학대하기는커녕 신사적으로 정중히 대하며 자기에게 마음을 열어줄 것을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체는 자기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파샤 셀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어떤 고문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가 바로 이 때 부르는 노래로, 화가 난 파샤 셀림이 고문이라도 해버릴지 모른다는 투로 말하자, 콘스탄체가 그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꺾지는 않을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그토록 벨몬테를 오매불망 사랑하던 콘스탄체는 잠입한 벨몬테와 만나고, 여차저차 탈출계획을 짜게 됩니다. 하지만 막판에 탈출 계획이 실패해 일행은 모두 잡혀버리지요. 주인공 일행은 이제 죽음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파샤 셀림은 관대하게 주인공 일행을 모두 풀어줍니다. 자유의 몸이 된 주인공 일행이 파샤 셀림의 관대함을 칭송하면서 오페라의 막이 내립니다.

 

'파샤 셀림'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콘스탄체가 팔려간 후궁은 이슬람 세력권에 있는 장소입니다. 콘스탄체는 배를 타고 가다가 해적에게 잡혀서 이슬람 지역에 노예로 팔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비단 작가가 창작한 설정만인 것이 아닙니다. 그 시기에는 유럽인들을 납치해 이슬람 세력에 팔아넘기는 해적, 일명 '바르바리 해적단'이 바다를 휩쓸고 있었거든요.

 

 

 

바르바리 해적단의 탄생은 1500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력은 에스파냐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의 넓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유럽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이슬람 세력은 축소됩니다. 1500년 즈음에 에스파냐 등지에서는 이슬람 지배세력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뿌리내리고 있던 이슬람계 주민까지 모두 추방해버리지요. 그런데 이 중 많은 수가 해적이 되어, 오스만 투르크 영역에 근거지를 두고 유럽 바다를 휩쓸며 사람들을 납치하게 됩니다. 이들을 일컬어 '바르바리 해적단'이라 합니다.

 

바르바리 해적단은 19세기 초 세계 정세가 변화하면서 완전히 괴멸되지만, 300여년 동안 맹위를 떨쳤던 공포스러운 대상이었습니다. 바르바리 해적단에게 잡힌 유럽인들은 백수십만명에 달했지만, 유럽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10만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잡힌 사람들은 노예로 팔렸습니다.

 

바르바리 해적단은 몸값을 낸 포로는 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몸값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팔려가거나,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는 자애로운 사람이 나타나주기를 하염없이 고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대 유럽 이야기에는 '구호기사단'이나 '구출기사단'이 고난에 처한 유럽인을 구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이들은 가난한 사람의 몸값을 대신 마련해 바르바리 해적단이나 노예상에게 지불했습니다. 몸값이 없어 풀려나지 못하면, 그대로 노예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궁 탈출>의 콘스탄체는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가, 관대한 주인을 만나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콘스탄체가 파샤 셀림의 호의로 풀려나게 된 이야기 역시, 역사적 전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르바리 해적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린 아가씨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슬람 주인이 관대하게 몸값 없이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프랑스 신문에 실린 적이 있지요. 이 일화는 일명 '관대한 이교도' 내지는 '고귀한 이교도' 클리셰와 맞물리며,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여러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귀한 이교도'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중에서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합니다. 요컨대 비록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 기독교를 믿으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2등급 시민 정도로는 인정해주지" 수준의 오만한 발상이 깔려 있지만, 18세기에는 엄청나게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고귀한 이교도'의 품성을 찬양하면서, 만행을 일삼는 기독교도 권력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도 있었고요. 말하자면 "이교도도 저 정도의 선행을 베푸는데, 기독교를 믿는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도라고나 할까요?

 

 

콘스탄체는 관대한 주인을 만나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노예로 팔린 사람 중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노예로 팔린 사람은 노예로 노릇만 하다가 노예로 죽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바르바리 해적단의 포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바르바리 해적단에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린 사람이 오스만 투르크 궁정이나 이슬람 세력권에서 출세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성은 이슬람 문화에 적응해 관료 노릇을 하게 되거나, 여성은 권력자의 총애를 받게 되는 경우이지요. 아주 운이 좋으면 술탄의 후계자를 낳아 다음 술탄의 어머니가 되기도 했습니다. 메흐메드 3세(1566~1603)를 낳은 사피예 술탄이 대표적인 경우로, 베네치아 귀족 여성->바르바리 해적단의 노예->술탄의 총비->다음 술탄의 어머니라는 인생역전극을 펼쳤지요. 하지만 권력자의 첩이나 측근이 되어 호의호식하게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비참한 노예 생활만 하다가 죽음을 맞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사피예 술탄은 베네치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이처럼 서민뿐만 아니라 부유한 유력자의 자제도 바르바리 해적단에 잡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실종된 사람 중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조세핀 황후의 사촌도 있었습니다. 조세핀의 사촌 에메 뒤비크 드 리베리 Aimée Dubuc de Rivery 는 열세 살 때 배를 타고 가다가 바르바리 해적단에 납치된 후, 영원히 소식이 끊겨 실종되었습니다. 에메 뒤비크가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실종되고 십수 년이 지난 후 사촌 조세핀이 프랑스 황후가 된 뒤에, 바르바리 해적단이나 이슬람 세력권에서 '조세핀의 사촌' 운운하는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에메 뒤비크 본인이 연락을 취한 적도, 에메 뒤비크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타난 적도 없습니다. 일국의 황후의 사촌이라는 것은 포로협상 등에서 상당히 유용한 존재일 테고, 에메 뒤비크가 조세핀과 모르는 사이인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조세핀이 황후가 되기 전에 죽은 것 아니냐는 추측이 많기는 하지만, 이 역시 정황증거뿐입니다. 에메 뒤비크 외에도 백만 명을 훨씬 넘는 유럽인이 이처럼 영영 실종되었고, 그저 노예로 팔렸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에메 뒤비크는 프랑스 황후의 사촌이라는 것보다도, 나크시딜 전설의 주인공으로 훨씬 더 유명합니다. 나크시딜, 혹은 나크슈딜 Naksh-i-dil 은 나폴레옹 시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었던 마흐무트 2세의 어머니입니다. 나크시딜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명은 고사하고, 언제 어디서 태어난 여성인지도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크시딜이 조세핀의 사촌인 에메 뒤비크라는 이야기가 굉장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요컨대 에메 뒤비크가 예쁜 여자노예로서 술탄에게 헌상된 뒤 총애를 얻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다음 술탄이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를 사실처럼 써 놓은 곳이 많습니다. 역사적 증거가 하나도 없는 건 둘째치고, 연도나 나이도 들어맞지 않는데도 그래요.

 

아들이라는 마흐무드 2세가 태어난 것은 에메 뒤비크가 11살 때, 에메 뒤비크가 실종된 것은 13살 때입니다. 이랬더니 모친을 잃은 마흐무트 2세를 양육하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11살 연상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면, 60살 많은 할머니도 어머니가 될 수 있을 테고,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은 훨씬 많아지겠네요. 마흐무트 2세가 서양문화를 많이 도입한 걸, 프랑스인 핏줄의 증거라고 내세우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강대한 외국의 장점을 도입하자는 건, 굳이 그 외국 핏줄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정책이니, 정황증거도 되지 못하지요.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가 프랑스와 적대한 걸 두고, 사촌 조세핀이 이혼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에메 뒤비크'가 아들 술탄에게 영향력을 미친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오스만 투르크가 프랑스 반대편에 선 건, 조세핀이 이혼당하기 10년쯤 전의 일인데도요. 심지어 프랑스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마흐무트 2세는 은밀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더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슬람교도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에 비견할 만큼 황망한 이야기입니다.

 

나크시딜이 에메 뒤비크일 가능성이 0%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역사학이란 '가능성이 희박하다'라고만 하지, 증거가 없다면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나크시딜의 신상이 에메 뒤비크가 아닌 다른 여인이라고 확실히 밝혀지거나, 에메 뒤비크가 그 시절 술탄 황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거나 그 전에 죽었다는 증거가 발견된 뒤에야, "나크슈딜은 절대 에메 뒤비크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그럴 수도 있다 / 그럴지도 모른다->틀림없이 그렇다"의 논리로 발전한다면 곤란하겠지요. 다른 것은 그렇다쳐도, '술탄의 어머니'가 프랑스 황후의 사촌이라면, 조세핀이 프랑스 황후가 된 뒤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요. 당시 나크시딜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협상할 때 아주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을 텐데, 아무 말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프랑스에서야 오스만 투르크 술탄의 모친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투르크에서는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조세핀이 이번에 프랑스의 황후가 되었다'라는 소식을 충분히 접했을 텐데도요.

 

역사적 증거는 전무하고 반증하는 증거는 넘쳐나건만,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쩌다가 이렇게 널리 퍼지고, 어느새 역사적 사실처럼 둔갑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굳이 출처를 찾자면, "가난한 유럽 여성이 노예로 팔린 후 술탄의 총비가 된다"라는 이야기가 로맨스 소설 등에서 널리 쓰이던 소재라는 것 정도일까요? 바르바리 해적단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이런 줄거리의 로맨스 소설이 다수 나왔습니다. 작품 자체는 작가 개인의 영역일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인기 있는 작품은 당대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기 마련입니다. 해적이 실제로 사람들을 잡아가던 시기에, 해적에게 잡혀 극적인 삶을 살다가 성공하게 된다는 성공스토리가 유행했던 것도 무관하지는 않겠지요. 바르바리 해적단이 사라진 뒤에도, 화려한 이슬람 궁정 문화와 각종 음모를 묘사할 수 있다는 장점 덕에, 그런 소재를 다룬 작품은 여전히 계속 나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