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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홍길동전>과 적서 차별 제도,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은 작품

아리에시아 2016. 4. 1. 16:37

사회모순을 고발하기 위해 그 사회모순을 묘사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는 여럿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예술작품이 현실에 영향을 미쳐서,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응집시키고 촉발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제외하고도 너무나도 흥미롭고 좋은 작품이라서, 그 사회문제가 사라진 뒤에도 대대로 향유되면서, 한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홍길동전>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홍길동은 한국의 고전소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유명할 것입니다. 고전소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홍길동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서류 작성 서식 등에서 이름을 기입해야 하는 견본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홍길동의 이름이 쓰여져 있으니까요.

 

홍길동은 교산 허균이 저술한 고전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입니다. <홍길동전>은 오랫동안 한국 역사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져왔으며, 최근에 <홍길동전>보다 이전인 중종 시기에 <설공찬전>이라는 한글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이 발견되는가 하면, <홍길동전>이 본래 한문으로 지어졌는데 한글로 번역된 판본이 널리 퍼진 것이지 한글소설이 아니었다는 견해도 강하게 제시되어,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잃어버렸지만, <홍길동전>의 생명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홍길동전>이 그토록 오랫동안 널리 읽혀지고 기억되었던 것은, 최초의 한글소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렬한 캐릭터성과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이니까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홍길동전>의 첫장입니다. 장서인이 여러 개 찍혀 있어서, 이 서적의 소장내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홍길동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길동의 아버지는 판서였으나 어머니는 집안 노비 출신의 첩이었습니다. 이런 혈통으로 태어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아버지와 정실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형을 형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각각 대감마님과 도련님으로 불러야 했습니다. 홍길동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지만, 정실 부인 소생이 아니기에 과거에 응시할 수도 관료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한편 서자 신분이면서 지나치게 비범한 홍길동을 경계하다 못해 홍길동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홍길동을 습격하지만, 홍길동은 도술을 부려서 자객을 물리친 뒤에,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활빈당이라는 의적단을 결성하여,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고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는 의적 활동을 하게 됩니다. 결말은 홍길동이 이웃나라로 떠나 율도국이라는 나라를 세운다는, 일종의 유토피아 왕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홍길동전>의 중심 갈등은 홍길동이 적자가 아니라 서자이며, 오직 그 이유만으로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을 받는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홍길동은 과거를 치를 수도 없었지만, 홍길동 본인은 입신양명의 길이 막혔다는 것보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다는 신세에 더욱 한탄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소설 속 설정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일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동양권에서는 오랫동안 적서 차별이 별로 없었고, 고려 시대 때에만 해도 서자도 적자처럼 엄연한 아들 대우를 받았으며 후계자가 되는 사례도 많았지만, 조선 초기 이후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생겨났고, 이 차별은 갈수록 강해집니다. <홍길동전>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시기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제도적인 적서 차별이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시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정한 설정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사대부에게 적자는 없고 서자만 있는 경우, 서자의 핏줄로 대를 이을 수 없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친척 자제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는 풍조가 일반화됩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서자 차별 풍조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겼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고자 했습니다. 허균 본인은 사대부 명문가의 적자였지만, 서자 출신을 친구로 사귀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서자 차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홍길동전>은 이런 허균의 문제의식과 사상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인 것입니다.

 

 

현대에 그려진 교산 허균의 영정입니다.

 

  개인적으로 <홍길동전>은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창작물에 대한 한 가지 테마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예술작품이 대중적인 재미도 지니면서, 문제의식도 아울러 널리 고취시킬 수 있을까요? 한 마리 토끼도 잡기 힘들 때,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요. 허균의 <홍길동전>은, 그 과제를 성공해냈으니까요.

 

<홍길동전>은 현대인이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홍길동의 갖가지 도술과 활극, 그리고 탐관오리를 응징하는 의적이라는 주제는 현대 독자가 읽기에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극심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독자도, 홍길동의 처지와 사회적 문제를 직시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지요. 조선 시대에 적서차별이 심했다는 것이 오늘날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데에는, <홍길동전>의 인기도 아마 한몫할 것입니다. <홍길동전>을 읽으면, 조선 시대 적서 차별 문화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되니까요. 또한 "아버지를 아버지가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다/호부호형할 수 없다."라는 한 문장으로, 당시 서출의 신세를 구구절절 나열하는 것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와닿으면서도 인상적으로 기억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홍길동의 서출 신분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 및 캐릭터성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부분은, 목적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성취하는 데 성공하고 있지요.

 

<홍길동전>을 읽다 보면, 홍길동처럼 비범한 인재를 단지 서출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제약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연설이나 해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도록 되어 있지요. 그러면서도 재미도 있습니다. <홍길동전>은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심했다는 것을 적서 차별이 폐지되고 조선이 사라진 뒤에조차도 두고두고 기억되게 만든 작품인 동시에,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창작물이 문제의식과 대중적 재미를 동시에 갖출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