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이 꼭 아름다운 결과물만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르네상스~바로크 초기 시대 왕족 및 귀족의 의상을 보면, 이런 점을 절절히 느끼게 되지요. 동양회화, 특히 수묵화에서는 붓질을 덜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많은 것을 담아낸다는, 이른바 "담"이라는 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초상화를 비롯한 서양 회화를 감상할 때에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수많은 초상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일명 '디츨리 초상화(1592년)'입니다.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독특한 패턴의 드레스는 엘리자베스 1세의 상징처럼 자리잡았으며, 엘리자베스 1세가 묘사된 삽화에서는 이 옷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웅장할 정도로 장엄하고 복잡하며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군주의 위용을 과시하는 목적이 강한 의상이며, 그 목적만은 충분히 달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학적인 측면에서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감상은 별로 들지 않는 디자인이지요.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이 의상이 위의 디츨리 초상화 의상보다 더 아름답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1546년 작품으로, 엘리자베스 1세가 13살 때 그려진 초상화입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는 공주도 왕위계승자도 아니라 지위가 불안정한 국왕의 사생아 딸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초상화의 의상도 왕족 기준으로는 간소한 편입니다. 보석 장식도 별로 없지요. 하지만 수많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위의 하얀 드레스보다, 이 의상이 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의상의 디자인이 특히 탁월해서가 아니라, 디츨리 초상화 의상은 수많은 보석 장식이 오히려 무언가 덕지덕지 붙였다는 느낌이 강하니까요.
브론치노가 1454년 그린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의 초상화로,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초상화입니다. 보석 장식은 거의 없지만, 갖가지 보석을 잔뜩 장식한 디츨리 초상화의 드레스보다 훨씬 품격있는 느낌을 줍니다. 정교하고 복잡한 무늬도 어지럽다거나 산만하다는 느낌은 없이, 우아하고 품격 있는 느낌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드레스를 디츨리 초상화의 의상처럼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를 넣었다면,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은 감소했을 공산이 큽니다.
비단 의상뿐만이 아니라, 유럽 회화를 볼 때 종종 느끼게 되는 점입니다. 정교한 디테일 표현을 집어넣으려다가, 오히려 과유불급이 되어버리는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카를로 크리벨리가 1480년에 그린 작품,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금속공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교한 장식 묘사가 압권입니다. 옷과 장신구의 디테일이 좀 과도한 감은 있지만, 막달라 마리아라는 인물이기에 그런 점도 어울립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호화롭게 치창한 창녀로 살다가 후일 참회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수많은 성녀들 중에서도 유난히 화려한 차림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책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정교한 세부묘사가 등장인물 한 명만을 부각시킬 때에는 작품 구도와 어울리지만, 널찍한 무대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묘사할 때에는 다음 작품처럼 되어버립니다.
에전에 언급한 적 있던 http://blog.daum.net/ariesia/125 카를로 크리벨리의 1486년 작품, <수태고지>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 앞 에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는 장면인데, 이 작품을 보면 천사와 성모 마리아가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건물의 정교한 장식이 시선을 분산시켜버리며, 완급 조절 없이 전체 화면이 거의 동일한 필치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더욱 산만하게 보입니다. 세부를 찬찬히 뜯어보면 구름자락이나 작디작은 소품마저도 하나하나 그려낼 정도로 정교하기 그지없는 디테일 묘사에 찬탄하게 되지만, 작품의 주제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감점 요소로 작용합니다. 정교한 세부 묘사에 묻혀서, 그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부각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가브리엘과 마리아보다 정교한 건물의 장식이나 공작새가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십상이라는 것은, 수태고지 그림으로서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인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가 작품 활동 초기인 1459년 완성한 <성 세바스티아누스>입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고대 로마 시대의 성인으로, 기독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기둥에 묶여 화살에 맞는 형벌을 받았으나, 기적의 힘으로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몽둥이로 마구 때리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몽둥이에 맞아 순교합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수많은 화살에 맞았는데도 죽지 않았던 기적은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전염병 등의 재앙을 막는 부적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만테냐의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제 감상은 이러했습니다. "건축물을 그리고 싶으면 건물을 그려야지, 건축적 디테일을 너무 과도하게 집어넣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렸다."라고요. 조각상 파편과 기둥 장식 등을 정교하게 묘사한 기교는 대단하지만, 크리벨리의 <수태고지> 못지않게 배경 및 소품 디테일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묻어버리고 있습니다. 애초에 저 모자이크 모양의 바닥장식부터가 감상자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고요.
정교한 디테일이 항상 그림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완급 조절을 적절하게 한다면, 주인공이나 주제를 묻어버리지 않고서도 정교한 디테일 묘사로 작가의 기교를 과시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스 홀바인이 1533년 그린 <대사들>입니다. 그림의 정중앙 위치에 갖가지 정교한 소품들이 놓여 있고, 주인공인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과 성직자였던 조르주 셀브는 오히려 양 가장자리에 서 있는 구도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중앙에 놓인 정교하게 묘사된 다채로운 소품보다, 양 옆의 주인공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갖가지 소품들을 정교하게 묘사해 작가의 기교를 하염없이 드러내였고, 중앙에 놓인 소품들도 최신 과학도구나 지구의 등 지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소품이기에, 두 대사가 지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까지 해내고 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가 위의 <성 세타스티아누스>를 그린 지 30여년이 지난 1480년에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입니다. 기둥이나 제단 파편 등이 무의미할 정도로 과도하게 정교하게 묘사된 것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존재감을 묻어버리지 않습니다. 주인공인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눈에 뚜렷이 들어옵니다.
만테냐가 1480년에 그린 작품인 <죽은 그리스도>는 디테일 절제미학의 극한을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을 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해 시신이 된 것을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이 가장자리에 작게 묘사된 것이 전부이며, 세부적인 장식 묘사 등은 일절 없습니다. 하지만 배경이 다채로운 소품과 정교한 디테일로 채워졌다면, 이렇게 초월적인 분위기는 절대 구현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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