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작품이 훗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적 명작으로 인정받는 사례는 여럿 있습니다. 명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너무 앞서나갔기 때문에, 혹은 너무 개성적이었기 때문에, 그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었건 간에,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의 삶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주문자의 주문대로 미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는지라, 더욱 그랬습니다. 당대의 기호를 따르지 않는 작품을 만든다면, 작품활동 내지 경제활동이 봉쇄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미술가가 작품을 완성해도, 주문자가 자신의 기호에 맞게 다시 제작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오늘날에는 원래 의 작품보다 개정판의 평가가 낮은 사례도 여럿 있지요. 이 블로그에서도 카라바조의 <성 바울의 회심> http://blog.daum.net/ariesia/4, <성 마태의 영감> http://blog.daum.net/ariesia/6, <성모의 죽음> http://blog.daum.net/ariesia/98, 자크 루이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http://blog.daum.net/ariesia/5 등의 사레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례 중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유명한 사례는, 아마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일 것입니다. <야경>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그림입니다. <야경>이라는 제목은 '밤 풍경'과 혼동되기 쉽다고 생각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야간순찰대>라는 번역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야경>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유명하지요.
<야간순찰대>의 원제는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입니다. 원제의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 대원과 민병대 대표인 프란스 반닝 코크를 그린 집단초상화로 의뢰된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간순찰대>가 완성된 직후, 이 작품은 극심한 비난과 혹평을 받았고, 작가인 렘브란트의 예술활동을 사실상 끝장내버리기까지 합니다. 렘브란트는 <야간순찰대> 주문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당대 네덜란드 최고의 인기 화가였으나, 이 작품으로 그 명성이 급속히 추락했으며. 이후 그림 제작 주문이 거의 끊겨버렸습니다.
<야간순찰대>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원래 집단초상화로 의뢰된 그림이었습니다. 에전에 렘브란트의 <툴프 박사의 해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듯이 http://blog.daum.net/ariesia/62, 렘브란트 시대 네덜란드에서는 집단초상화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집단초상화의 주문자들은 대개 자신의 얼굴이 뚜렷이 묘사되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고, 이 요구사항을 따르다 보면 경직되고 판에 박힌 구도가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때로는 주문자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면서도, 작가 본인의 예술적 성취까지 이루어내는 작품도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 화가 프란스 할스가 그린 집단초상화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모두 뚜렷이 드러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나름대로 역동적인 구도까지 갖추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의 얼굴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얼굴이 가려져 있거나, 그림자에 가려서 얼굴이 잘 안 보이는 사람이 많지요. 그래서 집단초상화를 주문한 민병대 대원들에게서 불만이 속출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이 불만 자체는 민병대 대원들이 <야간 순찰대>에서 드러난 얼굴의 비중에 따라 그림의뢰비를 분담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이 작품은 그와 별개로 극심한 혹평을 받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밝고 경쾌한 색감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에 비하면 너무 우중충해 보였으니까요. 렘브란트는 이후로도 <야간순찰대>처럼 명암 대비가 두드러지고 다소 어두운 색감의 작품을 그렸는데, 덕분에 그림 주문은 거의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는 렘브란트가 주문자의 의뢰를 받아서 제작한 대형 작품 중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 되었지요.
하지만 렘브란트와 <야간순찰대>는 오늘날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당대에 인기 있던 사조와 후대 역사에서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규정한 사조가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여럿 있지만, http://blog.daum.net/ariesia/44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처럼 극적이고 극단적인 사례는 드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림을 그릴 때 주문자의 기호와 예술성 사이의 딜레마에 대해, 더없이 극명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당대의 미술소비자와 주문자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림에 돈을 쓰고,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 그림에는 돈을 쓰지 않은 것뿐입니다. 최소한 렘브란트에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거나 협박한 적은 없지요.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런 명작을 그렸다는 이유로 오히려 작가가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에 안타까워지지만, 당대 미술소비자들의 태도와는 별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 풍의 화풍은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설사 당대에 예술성을 인정받았다고 해도, 이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화후원재단 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명성이 있고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는다는 이유만으로, 한 개인이 본인의 취향이 아니고 마음이 가지도 않는 것에 돈을 써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렘브란트는 '주문자가 기대할 법한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주문자의 기대사항은 단순히 주문자 개인의 기호 차원이 아니라, 그림 자체의 목적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단초상화를 주문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모두 잘 나오게 그려달라는 것은, 음식을 만들면서 영양이 풍부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요구사항이었습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니, 그 목적에 충실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의 역사성과 평가와는 별개로, 이 그림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것 자체는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렘브란트가 비난받을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이토록 예술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그게 어찌 비난할 일이 되겠습니까?
<야간순찰대>의 논란은, 비단 오늘날 명작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두고 옛날에 일어난 옛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특정한 요구사항이나 소비자의 기호에 맞춘 예술작품에 대한 오늘날의 논쟁과도 맞닿아 있는 대목이 은근히 많지요. 특정한 틀에 맞추는 것을 전제로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비를 받는다면, 작가의 재량은 어디까지인 걸까요? 계약조건에서 벗어나지만 결과적으로 보다 예술적인 작품성을 갖춘 작품을 완성했다면, 이것을 어떻게 평해야 하는 걸까요? 이건 유명한 원작을 각색할 때, 각색을 맡은 사람의 작품세계를 대폭 반영하는 경우의 논란과 직결되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원작 측의 요구사항이나 원작 팬의 기대사항과는 다르지만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 작품이 나온다면, 원작 측에서 불만을 가지면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 딜레마는 대중문화에 대한 또다른 딜레마와 맞닿는 테마이기도 합니다. 1차적인 소비자의 기호에 맞춘다는 것과, 작품적 완성도나 예술성은 별개로 보아야 하는 걸까요? 이것은 대중적 인기를 최우선으로 삼는 작품에서 특히 자주 제기되는 테마인데, 본질적으로는 대중문화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는 장편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면 거의 항상 문제시되던 일이고, 오늘날에는 시간대별 드라마나 연재처별 웹툰의 작품성 논란에서도 자주 제기되는 문제점입니다.
연재소설에서는 한 회 연재분 안에도흥미진진하고 눈길을 끄는 내용을 넣어야 했고, 한 회쯤 빠뜨려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다보니 작품의 전체적인 통일성, 짜임새, 개연성, 완성도 등의 이른바 "작품성"보다, 자극적이거나 파격적인 등 당장 원초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설정을 연달아 내놓는 것이 선호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앞 내용은 대략적으로 기억하는 상황에서 한 회 연재분만 보아도 내용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쪽을 선호하고, 작가 입장에서는 당장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소에 집중하는 것이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것보다 난이도가 낮습니다. 서양에서는 19세기 이해 수많은 연재소설이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지만,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남아 읽히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잊혀졌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작품성도 처참한 평을 받지요. 개연성 없이 자극적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거나, 전체적인 통일성과 짜임새가 부족하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는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앞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거나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고, 한 회만 보아도 그럭저럭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구성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소설의 전체적인 짜임새나 구성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작품성"이나 "예술성"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경향은 오늘날 드라마나 웹툰 등의 대중문화에도 역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침과 저녁 시간대의 드라마는 유난히 전형적이고 뻔한 내용으로 일관하거나, 개연성이나 완성도는 제쳐놓고 당장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설정만 연달아 내놓는다는 식의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이 시간대의 시청자 특성과 연계하면 자연스러운 경과에 가깝습니다. 이 시간대에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시청자는 사실상 주부 층밖에 없는데, 집안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한 회쯤 빼먹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거나, 처음부터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전형적인 줄거리여서 특정 장면만 따로 떼어 봐도 내용을 짐작하고 전개를 따라갈 수 있거나, 별 생각없이 보거나 아예 화면을 못 보고 소리만 들어도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멍이 많고 엉성하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시간 때우기로 설렁설렁 보는 입장에서는 결코 단점이 아니며, 그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회분씩 내용을 챙겨보는 연재소설에서 으레 그런 것처럼요. 치밀하고 촘촘하고 독특한 작품을 이런 상황에서 시청한다면, 머리 아프고 신경 쓸 게 많고 한 회만 빠뜨려도 내용 따라가기 힘들다는 말이나 나오겠지요. 그렇기에 이 시간대의 드라마는 유난히 뻔한 작품만 나올 수밖에 없게 되는 거지요. 이 시간대의 드라마 중 드라마 명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은 거의 없는데, 애초에 "작품성"을 중시한 드라마는 이 시간대에 배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 겁니다.
이른바 통속작품에서 자주 비판받는 이런 경향은 비단 오늘날의 드라마나 연재소설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서 항상 있었고, 대개 주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나오고, 그 중에는 당장의 대중적 기호와 맞아떨어져 인기를 끌면서도 짜임새 있고 치밀한 작품도 몇몇 정도는 나왔으며, 이런 작품이 명작, 고전으로 남았습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시대 연극은 글을 읽지 못하는 계층이나 즐기는 급이 낮은 오락거리가 취급이었고, 인기 소설을 내실 없는 불쏘시개 취급하는 인식은 중세 시대 아서왕 전설 문학이 창작되던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오페라의 황금기의 19세기의 오페라도 당대에는 비슷한 취급을 받았지요.
이런 인식이 무슨 터무니없는 우월주의에 기반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대중적 기호에 부합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한 작품들은, 앞서 언급한 아침 드라마나 저녁 시간대 드라마처럼 등장인물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판에 박은 듯 똑같거나, 당장 눈길을 끌 만한 장면만 나오고 전체적인 작품성은 없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요. 오늘날 고전으로 칭송받는 작품은 그 중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 중에는 당대에는 요상하고 재미없는 작품으로 인식되어 별 인기 없었던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대중적 기호를 충족시키면서, 작품적 완성도까지 갖춘 작품도 있지만요. 그 중에는 즉각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해서 이내 사라진 작품도 많았고, 어쩌면 그 중에는 계속 연재되었다면 오늘날 시대를 앞선 걸작으로 칭송받았을 작품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던 당대의 독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자기들이 재미를 느끼지 못한 작품을 안 본 것인데, 어쩌겠습니까. 대중성을 추구하는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인기 없는 작품의 연재를 중단한 것도, 아쉬울지는 몰라도 예술탄압이라도 한 것처럼 비난한 일은 될 수 없고요.
이 테마는 특정한 잡지나 사이트에서 게재되는 형태로 발표되는 작품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정 계층에 인기 있는 게재처에 작품을 발표할 경우, 그 독자층의 기호에 작품의 인기나 평가가 좌우된다는 것이지요. 한국 웹툰 연재처는 한국 문화계에서 이런 경향이 특히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입니다. 현재 한국의 웹툰은 연재 사이트에 따라 독자층이 뚜렷이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풍조가 대중문화이니만큼 인기를 얻는 것을 중시하는 풍조와 합쳐지만, 특정 연재처의 연재작들이 주요 독자층의기호에 따라 획일화되는 경향을 낳습니다. 중고등학생 독자가 많은 웹툰 연재처에서는 머리 비우고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작품만을 선호한다거나, 반대로 성인 만화가 인기를 끌고 그런 독자층이 압도적인 곳에서는 새 연재작으로 성인 만화만을 게재한다거나, 특정 취향이나 장르의 만화가 인기를 끄는 연재처에서는 그런 식의 작품만을 연달아 원한다거나, 이런 식입니다. 이런 기호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은, 연재처의 1차 독자에게 외면받는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인 겁니다.
특정한 기호에 맞추면서 예술성과 작품성도 갖춘다는 것은,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갖추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예술적으로는 다시없을 명작으로 칭송받지만, 주문자의 요구사항이나 당대의 기호와는 부합하지 않았던 렘브란트의 <야간순찰대>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건재한 이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대중적 기호나 특정한 스타일에 맞출 것을 원하는 사람과 계약했는데, 그 조건에는 어긋나면서 엄청난 예술성을 갖춘 작품을 내놓으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딜레마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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