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서 특정 장면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명장면이지만, 전체적인 극적 구성에서는 뜬금없고 통일성 없는 장면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별 감정이 없는 것처럼 표현되던 캐릭터가 갑자기 엄청나게 감성적인 대사를 한다면, 그런데 그 대사 자체는 정말 멋지다면, 이런 장면을 어떻게 평해야 할까요? 감상자의 성향에 따라서 극적 구성이 미흡하다고 여겨져 몰입을 못 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펼쳐지는 장면에 몰입해서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장면만 놓고 보면 명장면이지만, 전체적인 통일성을 해치는 경우, 아무래도 극적 완성도에는 지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측면이 평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창작 분야도 있고, 별 지장을 주지 않는 분야도 있겠지요. 오페라는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명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극적 통일성에 별달리 개의치 않는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극적 완성도를 무너뜨리더라도 자체적으로는 멋진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권장하는 지경에 가까울 정도로요. 짧아도 19세기 중반까지도 그랬습니다.
모차르트의 1780년 작품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가 24살 때 작곡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모차르트 오페라 아리아 중에 가장 좋아하는 아리아인 '오레스테와 아이아체'가 나오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이도메네오>의 등장인물 엘레트라는 분노와 치욕에 몸을 떠는 아리아인 "오레스테와 아이아체 D'Oresrte,D'Ajace"를 부르는데, 파워풀하고 격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아리아입니다.
2006년 잘츠부르크 공연에서, 소프라노 아냐 하르테로스가 '오레스테와 아이아체'를 부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오레스테와 아이아체' 동영상 해당 대목의 이탈리아어-한국어 번역 대역 대본입니다. 대본 자료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이 아리아는 개인적으로 소프라노 아리아 중 좋아하는 정도로 꼽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좋아하는 곡입니다. 하지만 <이도메네오>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이 아리아가 나올 때마다 기묘한 기분이 되고는 합니다. 작품 줄거리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산통을 깨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노래만 놓고 보면 무슨 부모의 원수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노래라도 되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 아리아를 부르는 캐릭터는 엘레트라는 외국 공주로서 이도메네오의 아들인 왕자 이다만테와 맺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다만테는 일리아라는 다른 캐릭터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리아와 이다만테가 맺어지자, 엘레트라는 격정을 쏟아냅니다. 일리아는 공주 출신이기는 했지만, 현재는 망국의 공주 겸 포로 신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일리아는 이다만테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이다만테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이 내려지자 자신이 대신 목숨을 바치겠다고 할 정도의 캐릭터입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새로운 신탁이 내려져,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며, 이다만테와 일리아를 결혼시키라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모두들 기뻐합니다. 단 한 명, 엘레트라만 빼놓고요. 한참 해피엔딩으로 작품이 끝나려는 참에, 엘레트라 혼자 분노가 끓어오르니 지옥 세상에라도 내려가겠다느니, 복수라도 할 것처럼 살벌한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따지고보면 저렇게 분노할 당위성도 딱히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분위기마저 따로 놉니다. 그렇다고 엘레트라가 새로운 갈등 요소라도 만들어내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저 아리아 뒤에 모두들 기쁨의 합창을 부르는 것이,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극적 구성으로만 놓고 보면, 통일성을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해피엔딩 결말을 공연히 심란하게 만드는 장면인 겁니다. 오죽하면 초연에서 이 아리아는 삭제된 채 공연되었으며, 작곡가 모차르트도 이 대목을 작곡하면서, 뜬금없고 황망한 장면이라고 툴툴대면서 작곡했다고 합니다. 막상 툴툴대면서도, 모차르트는 저렇게 멋진 아리아를 작곡했지만요.
이런 성향을 지닌 노래 중 가장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는, 아마 푸치니가 작곡한 <토스카>에서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일 듯합니다.
솔오페라단과 로마오페라단의 공동 공연인 <토스카> 영상입니다. KBS 중계석 프로그램의 영상으로,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1시간 12분 지점에서, <토스카>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가 나옵니다.
노래 자체만 놓고 보면, 가련한 아가씨에게 갑자기 고난이 닥치자 그것을 한탄하는 아련한 노래인데.... 이 아리아는 토스카라는 캐릭터와도, 이 노래가 나온 직후의 극적 전개와도 동떨어진 노래입니다. 토스카는 당당하게 행동하며 할 말 다 하고 할 일 다 하는 여장부 캐릭터입니다. 난데없이 경시총감이 애인을 체포하고는, 사형시킬 예정인데 토스카가 몸을 바치면 사형선고를 취소시켔다고 제의했으니, 아무리 여장부 캐릭터라고 해도 덜덜 떠는 것밖에 못하기는 하겠지요. 문제는 이 아리아 바로 다음 장면이, 토스카가 식탁 위에 있던 나이프를 집어들고 경시총감 스카르피아를 찌르는 장면이라는 겁니다. 바로 아까까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아련한 노래를 부르다가, 그 다음 장면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는 겁니다.
작곡가 푸치니는 처음 작곡할 때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지만, 여주인공에게 아리아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암묵의 규칙을 따라서 막판에 집어넣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분위기가 일변하며 저런 노래를 부르는 건 너무 뜬금없지요. 하지만 노래 자체는 정말 좋습니다. 푸치니 작품의 아리아 중에서도 가장 널리 불릴 아리아이며, 아마 오페라 아리아 중에서도 유명하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아리아일 겁니다.
적어도 오페라에서는, 극적 타당성보다 아리아의 음악적인 매력이 더욱 중시됩니다. 오페라는 수백년간 멋진 노래와 가수의 가창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작장르나 다름없었고, 이런 경향이 사라진 것은 빨라야 19세기 중후반부터입니다. 그리고 오페라는 유명한 아리아 한두 곡만 따로 콘서트 등에서 부르거나 음반으로 취합해 듣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극적 구성을 해치더라도 노래 자체는 좋은 아리아가 자연스럽게 주목받게 되는 흐름으로 흘러갔습니다. 극적 구성과 장면 자체의 주목도 중에서 유독 오페라에서 후자가 압도적으로 중시되었던 것은, 이런 감상 문화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 블로그 주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려나간 그림들-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등 (0) | 2016.08.27 |
---|---|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소재의 오해 (0) | 2016.06.04 |
허균의 <홍길동전>과 적서 차별 제도,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은 작품 (0) | 2016.04.01 |
과유블급과 절제의 미학, 디테일의 사례들 (0) | 2016.03.26 |
벨라스케스의 <브레다의 항복>, 역사의 미화와 상기 사이에서 (0) | 2015.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