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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고전의 단장취의

아리에시아 2015. 12. 12. 12:00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를 비롯해 여러 역사 저술을 남겼으며, 자신이 살았던 당대의 사건과 인물을 기록한 책도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40세 가량 되었던 기원후 98년경,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이 바로 오늘날 <게르마니아>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게르마니아란 오늘날의 독일 지역을 일컫던 라틴어 지명입니다. 독일을 뜻하는 영어단어인 Germany의 어원이기도 하지요. 제목처럼 고대 로마 시절 현대의 독일 지역에서 살던 부족들의 생활방식, 각종 풍습과 문물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이 지역에 방문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기에,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기록했으리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입니다. 다만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에 대해 잘 아는 로마인에게서 관련 정보를 얻어 책을 썼는지, 아니면 타키투스가 그저 떠도는 풍문을 적당히 정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게르마니아>에 대한 학술적 신뢰성도 확정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게르마니아>는 딱히 주목받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필사본은 단 한 부 뿐이며, 그나마 타키투스가 그런 책을 쓴 적 있다는 것도 금세 잊혔던 듯합니다. 중세에 대한 흔한 이미지와 달리 중세 유럽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대 로마의 저술은 면면히 연구되었는데, 이 때에도 <게르마니아>를 연구했다는 기록은 현재로서는 발견된 적 없습니다.

 

고대 로마 이래 <게르마니아>라는 책 제목이 다시 역사 속에서 등장한 것은 1425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필사본이 이 때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아에시나스 필사본 Codex Aesinas 이라고 불리게 될 이 책이 수백 년 후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될지, 이 때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게르마니아> 아에시나스 필사본의 첫 페이지입니다. 양피지에 라틴어로 쓰여져 있는데, 이 책이 발견될 당시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배웠기 때문에, 거의 곧바로 해독되었습니다.

 

 

<게르마니아>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이미지는 대강 이렇습니다. 타키투스는 당시 로마의 여러 병폐를 개선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외국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글을 써서, 그 나라를 본받자는 식의 메시지를 퍼뜨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의 좋은 면만 강조하거나, 심지어 그 좋은 면을 상상하는 수준으로 이상화시켜서, 외국의 이러저러한 점을 본받자는 논리로 자국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는 이야기지요.

 

 

19세기와 20세기 초중반 <게르마니아>가 어떤 이미지로 통용되었는지를 보면, 저런 통념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19세기 이래 독일 민족주의 열풍이 불 때, <게르마니아>에 묘사된 게르마니아는 고대 독일의 이상향같은 존재로 통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흔히 그렇듯이 국수주의적, 배타적, 인종차별적 관념이 생겨났을 때에는, <게르마니아>에 묘사된 고대 게르만 국가를 본받자는 명목으로 이것이 정당화되며 권장되기까지 했지요. 그리고 20세기 나치 정권이 집권했을 때, 이런 민족주의적 해석은 정점을 찍습니다. 나치 정권은 게르마니아에 묘사된 고대 게르만 국가를 되살리자는 것을 국가정책의 기치로 삼다시피 했고, <게르마니아>의 해석도 더한층 극단적으로 치달았지요.

 

이 시기 <게르마니아>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을 보면, 황당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게르마니아>에서는 게르만족이 다른 민족과 통혼하지 않고 게르만족끼리만 결혼한 것을 민족의 순수성 차원에서 높이 평가한 대목이 있으니, 오늘날 독일인도 고대 게르만 정신을 본받아 게르만 족끼리만 결혼하여 핏줄을 보존하자는 주장이 널리 퍼졌고, 나치 정권은 이것을 국가 정책으로 실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게르마니아>에 고대 게르만족이 용맹하다는 구절이 있으니, 게르만족은 용감하게 싸워햐 마땅하며, 나아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 게르만족의 본분이라는 식의 논리가 통용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는 이런 사례들을 연구한 <가장 위험한 책:로마 제국부터 나치 독일까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라는 책을 저술한 적 있는데, 실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 속출하는 진풍경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해석"이 사회 분위기, 나아가 국가정책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상기하면, 소름이 끼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막상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을 찬양하거나 이상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들자면, 저는 저런 이미지를 접한 상태에서 <게르마니아> 완역본을 읽었는데, 게르만족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과는 거리가 먼 서술이 연달아 나와서, 꽤나 당혹스러웠습니다. 게르만족이 용맹하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된다던 구절은, 막상 <게르마니아> 본편에서는 "여기에는 문명이라는 것이 없고, 사람들은 싸우는 법밖에 모른다."라고 해석하기에 훨씬 더 적합한 문장이었습니다. 게르만족의 순수 혈통 운운하는 대목도, 다른 민족 핏줄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찬미하는 이야기는 딱히 없었고, 그냥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결혼한다."라는 논조로 쓰여져 있는 식입니다. 이른바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을 이상적으로 묘사했다는 대목은, 태반이 저런 식이더라고요. 앞서 언급한 크레브스의 <가장 위험한 책>과 <게르마니아> 완역본을 같이 읽으면, 기사도 소설을 패러디하고 기사도적 행동이라는 것을 웃음거리 소재로 삼은 <돈 키호테>와 기사 활동을 엄청나게 진지하게 묘사한 기사 문학을 같이 읽을 때를 능가하는 당혹함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단장취의에 왜곡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재창작 수준입니다. 자기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고전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구절만 뽑아오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고, 그 구절을 자기들 좋을 대로 "재해석"라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만, 이른바 <게르마니아>의 민족적 해석"은 책을 아예 새로 쓰는 수준이었으니까요.

 

 

 

19세기 이래 근 한 세기 동안, 민족주의 유럽 각지를 휩쓸었으며, 그 중에서도 독일 지역에서 특히 흥성했습니다. 독일 지역의 민족주의 열풍은 역사적인 족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합니다. 독일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은 1871년 독일이 통일되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는 데 근간 역할을 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 독일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시기 독일 예술 중에는 민족주의 이념을 반영한 작품이 많은데, 그 중에는 오늘날 고전으로 남은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게르마니아>가 유난히 심하게 왜곡되었던 것은, 이 책을 민족주의의 경전으로 삼았던 독일 지역의 상황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71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독일은 수백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군주가 독자적인 영지를 다스리며 할거하는 형태였습니다. 1618년-1648년 동안 벌어졌던 30년 전쟁이 시작될 즈음 독일 지역에는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300여명에 달했으며, 마을 하나 성 하나 수준의 작은 영지를 가진 영주 수준의 군주까지 계산하면 2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 군주들은 모두 독립적인 군주로 인정받았고, 독일 지역 군주들은 공(公)의 지위를 지녔으며, 이 나라들도 독립적인 공국이었습니다. 이후 이 수많은 공국 중 군주의 대가 끊긴 나라가 생길 때마다 영주의 친척에게 상속되었고, 친척 상속권자는 다른 지역의 군주를 겸하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조금씩 통합되면서, 19세기에는 독일 지역 공국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통일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민족주의 열풍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다른 나라의 속국인 경우,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이 그랬듯이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 나라를 다스리자는 식의 방향이 첫번째였고,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다른 나라들끼리 같은 민족이니 뭉치자는 식의 방향이 두 번째였습니다. 독일 지역의 민족주의는 두 번쨰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 존재한 적도 없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도 힘든 통일 국가란 너무 막연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 <게르마니아>가 일종의 상징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 책의 단장취의가 시작되고, 민족주의란 이름 하에 이것이 규탄되기는커녕 권장되자,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 제국에 이르면, 이런 민족주의 단장취의는 그야말로 극에 달합니다. 나치 제국의 민족주의적 제도 중에는 어처구니없어보이는 규정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게르마니아>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 많습니다. 일례로 나치 제국의 SS, 즉 히틀러의 친위대 규정에 따르면, 친위대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나치 정부가 순수 게르만족이라고 인정한 혈통이어야 하며, 금발에 푸른 눈이어야 했고, 신장이 178cm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특히 신장 규정은 비현실적일 정도였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20세 전후의 "건강한 독일인" 남성의 평균 키는 163cm였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집권 당시 20세 전후의 남성이라면 세계 1차 대전 때 영유아기를 보낸 세대였는데, 자연히 영유아기 때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경우가 출했고, 체격이 작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금발에 푸른 눈이어야 한다는 외모 규정을 굳이 집어넣은 것도, 정부의 게르만족 혈통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규정과 중첩되고요.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규정이, 바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서 따온 구절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타키투스는 지나가듯이 게르만족 남자들은 건장하고,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키가 180cm 이상인 사람이 많다는 식으로 썼는데, 이걸 근거로 친위대가 되려면 키가 178cm 이상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든 것입니다. 20대 남성의 평균 키가 163cm이던 시절예요. 게다가 게르만족는 금발에 푸른 눈를 가졌다는 식으로 언급했는데, 이것이 "금발벽안이 순수한 게르만족이다"라는 식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규정들은,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을 칭송했다는 이미지를 들먹이며 정당화되었지요. 이 때 실제 책에서는 지나가듯 언급하기만 하고 칭송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거나, 오히려 그 반대의 분위기에 더욱 가까운 어감으로 쓰여진 구절을 따와서 왜곡하는 사례가 넘쳐났습니다.

 

 

<게르마니아>는 고전작품과 민족주의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사례이자 반면교사로 손꼽힙니다. 동시에 고전을 입맛대로 왜곡하는 것이 얼마나 손쉬운지, 그리고 옛 문헌을 특정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입맛대로 써먹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으면서도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더없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옛 문헌에도 이런저런 내용이 있으니 자신들의 주장이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입맛대로 왜곡해서 자기 좋을 대로 써먹는 것에 가깝지요. 이런 일이 비단 고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고전을 대상으로 삼았을 때에는 무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고, 자연히 정당성이 강화된다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이런 움직임이 계속되고 가속되면, 숫제 책을 새로 쓰면서 유명한 고전의 이름값만 빌려오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이것이 근대 독일 민족주의가 <게르마니아>를 "해석", "인용", 혹은 "왜곡"했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매커니즘이 비단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와 <게르마니아>에만 해당된 것이라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