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신비로운 예술작품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로마네스크 시절 칙착하고 둔탁한 건물에 익숙해져 있다가, 고딕 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총쳔연색 빛이 쏟아져내리는 모습은 천국과도 같이 보였을 거예요.
세계의 스테인드글라스 가운데 가장 유명할,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미의 창>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자체도 아름답지만, 저 총천연색 유리창으로 햇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스테인드글라스가 처음 생긴 계기는,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하고 신비로움에 매료된 입장에서는 허탈해질 정도로 엉뚱합니다. 유리공예나 유리의 역사 등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평평한 판유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대중적으로 보급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고, 값비싼 사치품으로나마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그 이전 백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은 거울 400개로 장식해 환상적인 풍광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방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환상적인 연출효과뿐만 아니라 귀하고 비싼 거울을 수백 개나 장식했다는 것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큼직한 유리창은 꿈같은 존재였지요.
하물며 중세 시대, 큼직한 유리창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리판을 만들 수 없어서 유리조각을 모아 모자이크하듯이 서로 이어 유리판을 만들던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유리창에 색을 넣게 된 것도, 당시 기술로는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를 만드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색을 넣게 된 것이 시초였고요. 유리판을 만들 수 없다는 재료와 기술의 한계를, 오히려 다채로운 유리조각을 잇는 스테인드글라스 예술로 승화시킨 셈이지요.
의상에서도 이런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 사례가 많습니다. 독특한 패션이라고 생각했던 게, 옷감이나 재단기술의 한계를 패션으로 승화시킨 경우가 꽤 있지요. 특히 유럽복식의 옷소매 형태와 당시 직조기술을 같이 견주어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쏟아져나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그 즈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는, 저렇게 독특한 옷소매가 많이 나옵니다. 어깨와 팔꿈치에 쿠션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생겼지요. 그런데 사실 저 패션은, 당시 옷감으로는 제대로 옷소매를 만들 수 없었기에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기술로 튼튼한 옷감을 만들면 접힐 수도 없을 정도로 뻣뻣했고, 얇은 옷감을 만들면 내구성이 약했던 겁니다. 그래서 튼튼한 옷감으로 옷소매를 만들되, 팔꿈치나 어깨 부분 등 고정되지 않고 자주 접히는 부분은 부드러운 옷감으로 충당했던 것이지요. 소매는 접합부분이 있는 곳마나 끊어서 따로따로 만들었고, 리본 등으로 옷에 묶어 착용했습니다. 중세 기사 문학에서는 기사에게 행운을 비는 부적이랍시고 옷소매를 뜯는 대목이 나오기도 하는데, 저런 구조였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재봉을 뜯는 게 아니라, 리본만 풀면 되거든요.
헨리 8세의 다섯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의 초상으로, 1535년에서 1540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옷소매가 직선적인 디자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의 뻣뻣한 옷감으로는 곡선적인 디자인의 옷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직조기술이 예전보다는 많이 발전해서, 팔꿈치에 다른 천을 동원하지 않아도 원래 천으로 팔꿈치 부분까지는 소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전 시기의 옷감은 얼마나 뻣뻣했을지 상상이 되실 겁니다. 그런 뻣뻣한 천을 저렇게 멋들어진 패션으로 승화시킨 겁니다.
이 드레스에서는 어깨뽕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뻣뻣한 옷감이라는 재료적 한계를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결과물입니다. 옷의 몸통 부분과 소매 부분을 따로 연결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이음새 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걸 가리기 위해 어깨에 천을 덧대 장식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저런 어깨장식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재료적 한계가 시초가 되어 생긴 패션은 남자 의복에도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기사라고 하면, 이런 형태의 중세풍 겉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지요. 저 겉옷은 서코트 surcoat 라는 옷인데, 어떤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뜻하는 소속군대의 표식이나 기사 개인의 가문의 문장 등이 새겨져 있었으며, 화려한 서코트를 입는 것은 기사의 위용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중세 기사도 문학에는 등장인물들들이 화려한 서코트를 입고 있는 것을 위풍당당하게 묘사하거나, 유명한 기사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볼품없는 서코트를 입고 다니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서코트는 금속갑옷이 빛을 반사하는 바람에, 반사광을 덮기 위해서 천을 덮은 것에서 생겨난 의상입니다. 금속갑옷에 반사되는 광택이 눈이 부실 지경이어서 제대로 볼 수도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동원된 셈이지요. 이것이 패션으로 발전해 중세 기사의 상징처럼 된 것입니다.
중세 시절 유리판을 만들 수 있었어도 누군가가 스테인드글라스를 시도했을지 모르고, 유럽에 부드럽고 튼튼한 옷감이 생겼어도 누군가가 저런 옷소매를 패션으로 고안했을지도 모르고, 빛을 반사하지 않는 금속갑옷을 만들었어도 서코트를 고안해 입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현재까지의 역사에서 저 사례들은 재료의 한계를 예술로 승화시킨 발상과, 에술로 다듬어낸 노력 덕분에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술발전을 추구하는 것보다, 발상의 전환으로 예술로써 승화시킨 것이 훨씬 더 풍요롭고 인상적인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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