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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외적인 요소로 학설을 평가할 때, 제멜바이스와 의사의 손씻기

아리에시아 2014. 9. 13. 11:58

근대 유럽에서는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정말 많았습니다. 왕비나 귀족부인 중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성이 너무나도 많아서, 웬만큼 유명한 사람만 꼽아도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왕비를 여섯 명이나 두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데, 그 중 셋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와 여섯째 왕비인 캐서린 파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무적함대로 유명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결혼을 네 번 했는데, 첫째 왕비와 네번째 왕비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셋째 왕비는 사산 후유증으로 죽기도 했지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어머니도 메리를 낳다가 죽었고요.

 

유럽에서는 아이를 낳다가 갑자기 고열이 나면서 죽는 산모가 무척 많았습니다. 이런 병을 일컬어 일명 산욕열이라 했지요. 그런데 당시 유럽의 출산 환경과 의학 수준을 생각해보면, 아이를 낳다가 병에 걸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의사는 절대 손을 씻지 않고 임산부의 출산을 도왔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상처나 시신을 만진 손이 임산부의 몸에 닿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다가 감염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요. 습기 많은 지하실 같은 곳에 건더기 많고 많이 씹어야 하는 음식을 주면 산모가 빨리 회복될 거라는 식의 이야기가 버젓한 의료 지침으로 나돌던 시대였고, 사람이 아프면 몸에 나쁜 피가 원인이라면서 일단 피를 뽑는 사혈/방혈 요법이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산모에게 병원균과 접촉하고 손을 씻지 않은 의사의 손이 닿아 병원균에 감염되고, 가뜩이나 출산으로 몸이 허약해져 있는데 "나을 때까지" 피를 뽑으면 어떻게 될지는, 의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사태에서 역설적인 것은, 돈이 없어서 의사를 부르지 못하는 계층에서는 오히려 아이 낳다 죽는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겁니다. 근대 유럽의 장례식 관련 기록 등을 보면, 서민 계층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다 죽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 여겨지는데, 하나는 서민 여성들은 평소에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운동이 되어 있어 아이 낳기가 수월했을 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손 씻지 않고 환자 돌보기, 일단 피부터 뽑기 등의 당시 의료지침을 보면, 의사를 부르지 않는 쪽이 생존율이 높다는 결과가 곧바로 납득될 지경이지요.

 

 

그렇다고 이게 산모 환자일 때만 해당되는 거냐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파스퇴르 위인전에는 파스퇴르가 미생물을 발견한 후 의사들이 철저하게 소독하도록 지시했고, 그 덕에 환자 사망률이 급감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이팅게일 위인전에는 나이팅게일이 웬만한 수용소보다 훨씬 열악한 야전병원을 보고 경악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청소도 하지 않고 침구 세탁도 하지 않은 곳에서 의사들이 더러운 손으로 환자를 만지를 것은, 귀족 아가씨였던 나이팅게일에게는 경악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야전병원의 환경은 당시 병원의 표준과 별 차이 없었던 것이지요.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에서 본격적으로 간호하기 전에 침구부터 세탁했고, 그 뒤로도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야 그저 정성을 다해 간호한다는 차원에서 그랬을 테지만, 나이팅게일이 간호한 병사들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차도를 보인 것은, 아마 이렇게 위생상태를 개선한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팅게일이 보고 경악했던 그 야전병원 같은 상태가 수많은 산모들의 현실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출산을 돕는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개념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파스퇴르에 이르러서였습니다. 20세기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파스퇴르가 미생물을 발견하고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하기 전에는,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통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일까요? 이론적으로는 간파하지 못해도 경험과 노하우로 무언가를 앞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이 상온에서는 부패하고, 밀봉하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하며 병조림/통조림이 발명된 것을 들 수 있겠지요. 그 원리는 파스퇴르가 비로소 규명했지만, 통조림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파스퇴르가 등장하기 수십년 전인 1810년이었습니다. 통조림의 기원이 되는 병조림은 그보다 몇 년 더 먼저 만들어졌고요. 원인은 비록 몰랐다고 해도, 경험이 쌓이면 밀봉한 음식은 상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파스퇴르 이전에도 의사가 손을 씻으면 산욕열이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상으로 간파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1818-1865)였습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의 이론은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제멜바이스는 죽을 때까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제멜바이스의 초상. 죽기 5년 전인 1860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제멜바이스가 근무하던 병원에는 산모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수용했는데, 첫번째 그룹에서는 산모 사망률이 20%가 넘는 반면 두번째 그룹에서는 산모 사망률이 2% 내외였습니다. 저 수치가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유지되자, 제멜바이스는 두 그룹의 차이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그룹에서는 의사가 출산을 돕고, 두번째 그룹에서는 산파가 출산을 돕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었습니다. 순전히 무작위로 산모들이 어떤 그룹에 가게 되는지가 결정되었으니 산모들의 건강상태 같은 것도 평균적으로는 별 차이 없었고, 음식 등 환경적 요인도 완전히 동일했으니까요. 의사와 산파의 차이점은 대체 무엇이기에, 학교교육을 받은 의사들의 환자가 훨씬 더 많이 죽었던 것일까요?

 

제멜바이스는 민간요법을 따르는 산파들은 손을 씻고 산모를 돕지만, 의사들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손을 씻지 않고 산모를 돕는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손을 씻으면 산욕열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많은 의사들은 반발했지만, 제멜바이스는 병원 책임자라는 지위를 이용하며 의사들이 손을 씻어야 한다고 밀어붙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손을 씻게 되자마자, 의사들이 맡던 첫번째 그룹의 산모 사망률은 산파들이 맡던 두번째 그룹의 산모 사망률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이론에 확신을 가지고, 의사가 손을 씻으면 산욕열이 생기지 않는다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뚜렷한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존 학계가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이론을 배격하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파격적인 이론이라고 발표된 새로운 학설이란 엄청나게 혁신적인 이론일 때보다,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는 엉터리 이론일 때가 수적으로는 훨씬 더 많았거든요. 착각해서 엉뚱한 학설을 만들어낸 경우도 많았고, 사기치려고 작정하고 연구와 논문을 통째로 조작하다시피 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경과를 알고 있으면서 정선된 역사적 사실만 보는 후대인의 입장에서는 "왜 저렇게 명백한 사실을 발표했는데, 기존 권위자라는 사람들은 속좁게 방해해서 학문 연구를 정체시키는 걸까."라고 못마땅하게 보이기 십상인데, 그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발표된 "파격적인 이론" 중 역사에 남은 숫자는 극히 적다는 걸 감안하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쭉정이와 알곡이 섞여있는데 쭉정이 비율이 훨씬 높다면, 뭘 집었을 때 일단 쭉정이일지 모른다는 의심부터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테니까요. 파스퇴르 이전이라 미생물을 알지 못했던 제멜바이스처럼, 원리를 규명하지 못하고 정황만을 내세운다면 더욱 그랬지요. 1847년 처음 발표하던 시점에서 제멜바이스의 이론은, "내가 의사들에게 손 씻기를 시켜보았는데 사망률이 줄어들었더라."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식으로 논문을 쓴 건 몇 년 뒤였고, 그 몇 년 동안 다짜고짜 의사는 손을 씻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기만 했지요. 다급한 것은 십분 이해가 되고, 제멜바이스의 임상실험만으로도 충분히 성과가 있었으니 한 번쯤은 검토할 법도 한 것을 무시한 것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정식 논문도 없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반응에도 일리는 있었습니다. 학계에서 정식 논문을 작성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다짜고짜 거짓부렁이라고 밀어붙이는 태도는 과격하기는 했지만, 명분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제멜바이스의 이론이 배격된 것에는, 학문 외적인 이유가 굉장히 컸습니다.

 

 

제멜바이스의 이론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고 파격적이었습니다. 의사가 상처 고름 냄새 등을 풍기는 것을 일을 열심히 하는 증거라고 여기며 은연중 자랑스러워하는 풍조가 있었던 데다가, 제멜바이스는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를 규명하지도 못했으니 배격할 명분도 충분했습니다. 의사들이 손을 씻자 산욕열이 급감한 것은, 그 당시 병원의 환기장치를 대대적으로 수리했으니 환기가 잘 된 덕이라고 치부되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쫓겨나다시피 물러나야 했고, 그 직후 의사들은 다시 손을 씻지 않고 산모를 돌보기 시작했으며, 산욕열과 산모 사망률은 예전처럼 치솟았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죽을 때까지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때마다 더욱 배척당하기만 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죽을 때까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고, 죽은 뒤 수십 년이 지나 파스퇴르가 미생물을 발견한 뒤에야 비로소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제멜바이스의 태도도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이 믿는 것은 일체의 주저함 없이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는데, 이런 성격은 무언가를 수행할 때에는 추진력이 되지만, 다른 사람과 논의할 때에는 벽창호처럼 느껴지기 십상이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의사는 환자를 살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윽박지르고는 했는데, 결과적으로야 맞는 말이었지만, 당시 의사들에게는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법을 같이 찾아봐 개선하자는 식으로 표현했다면, 의학계의 반응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제멜바이스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활동했지만, 헝가리 출신의 독일계로서 독일어 사투리와 헝가리어만 구사했고, 빈 표준어에는 서툴렀습니다. 때문에 논문이나 연설에 아무래도 서툴렀고, 이게 제멜바이스의 학설을 매도하는 구실이 됩니다.

 

 

게다가 정치적인 편가르기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멜바이스는 헝가리 출신이었는데, 당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국 중 하나였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제멜바이스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 헝가리 군주와 오스트리아 군주가 서로의 누이와 결혼해 겹사돈을 맺으면서, 한쪽이 아이 없이 죽으면 다른 쪽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협정을 맺었는데, 헝가리 군주가 아이 없이 죽으면서 오스트리아 군주가 헝가리 왕을 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복종하기보다 자체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했는데, 민족주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한 발 더 나아가 헝가리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도 생기게 됩니다.

 

제멜바이스가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견해를 발표한 다음해인 1848년, 헝가리에서는 헝가리 주권을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정치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제멜바이스는 헝가리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멜바이스의 이론에 동조한다는 것은,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는 셈이 된다는 식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헝가리는 가뜩이나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반항적이랍시고 공공연히 미움받던 처지였는데, 무려 분리독립 주장이 주류 계층 사이에서 어떻게 인식되었을지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제멜바이스가 근무하던 병원에서는 제멜바이스의 학설에 납득하는 의사가 여러 명 있기는 했지만, 당시 병원 총책임자는 헝가리 편을 든 제멜바이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보면, 제멜바이스의 학설에 동조한다면 헝가리 분리독립 주장을 편들기라도 하자는 식으로까지 보일 지경입니다. 1849년 제멜바이스는 산부인과 담당의사 자리에서 쫓겨났고, 그 후임자는 제멜바이스가 도입한 모든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제멜바이스는 완전무결하고 무구한 순교자는 아니었습니다. 변방 출신이라는 것을 컴플렉스에 가깝게 의식하고 있었고, 표준어에 서툴러 논쟁이나 연설, 논문 쓰기 등을 되도록 기피했다는 것, 자신이 믿는 것을 윽박지르는 성격, 정치적 소수파를 대놓고 옹호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는 것 등을 보면, 제멜바이스가 파격적인 학설을 발표했을 때 미치광이 취급부터 받은 것이 이해가 갈 정도입니다. 가뜩이나 황망할 정도로 파격적인 학설이라 믿기도 힘든데, "평소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어?"라는 말이 나오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까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제멜바이스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던 동료 의사 중에서는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여러 명 있었지만, 병원 밖에서는 가뜩이나 믿음도 가지 않는 위인의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로만 여긴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의 행적 중 학술적 관점에서 지탄받거나 '학자'로서의 활동에 약점이 될 일은, 정식 논문을 쓰기도 전에 견해를 성급히 발표했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마저도 의사들이 손을 철저히 씻자 환자 사망률이 급감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로 나타났으니, 정식 논문이 없다 해도 수용할 명분 정도는 충분했습니다. 학문 외적인 요소는 제멜바이스 개인의 호감도를 깎을 수는 있겠지만, 그 선에서 그쳐야 했습니다. 학문 외적인 분야에서 비호감 요소가 아무리 많다 해도, 학설 자체만을 평가했다면 병원에서 감염되어 죽은 수많은 산모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테고, 산욕열의 역사, 나아가 의학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일은 비단 제멜바이스에게만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가 파격적인 발표를 했을 때, 평소 행적에 대해 운운하며 그런 사람의 견해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식의 논리로 흘러가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았습니다. 누가 엉뚱한 발표를 했는데도, 평소에 인간적으로 호감을 얻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견해가 채택되는 경우도 있고요. 학문은 학문 자체만으로 평가해야지, 학문 외적인 요소를 개입하면 학문적 논의와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제멜바이스의 사례는 너무나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