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는 1985년 <쿠오 바디스>라는 소설을 발표합니다. 이 작품은 190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할리우드 등에서 여러 번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51년 머빈 르로이가 감독하고,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가 남녀주인공을 맡은 영화는 대작 고전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3만 벌 넘는 영화의상을 제작하는 등 막대한 물량공세로도 유명하며, 고전적이고 표준적인 대작 고전영화의 전범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이지요.
<쿠오 바디스> 1985년 초판 표지와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초상화입니다.
<쿠오 바디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고대 로마에서, 남주인공인 로마 귀족 비니키우스와 여주인공인 리기아는 서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주인공 커플은 기독교로였고,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로마에 대화재가 나자, 기독교도들이 방화한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서 기독교도를 체포하고 처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설 속에서 기독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네로 황제가 암살당하면서, 기독교도들의 고난은 끝나고 해피엔딩이 찾아오지요.
<쿠오 바디스>에서 기독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압제자로 나오는 네로 황제는 실존인물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5대 황제였지요. 오늘날 네로 황제에게는 희대의 폭군이라느니, 기독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했다느니, 로마에 화재가 났을 때 그 풍경을 보면서 음악을 연주했다느니, 로마에 자신이 방화하고는 기독교도에게 누명을 씌웠다느니 등의 이야기가 종종 따라다닙니다. 네로 황제에게 이런 이미지가 강해진 데에는, <쿠오 바디스>가 널리 읽히고 유명해진 것도 주요 원인이었다는 해석이 많지요.
로마 제국 5대 황제 네로의 초상 조각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학계에서 바라보는 네로 황제는, <쿠오 바디스>에서 묘사된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잔학무도한 폭군이라기보다,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기질이 엉뚱하게 발휘되어 국정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통치자로 평가하고 있지요. 게다가 네로의 악행이라는 것도,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 검증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희대의 폭군처럼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입증된 네로의 행적 중 일반적인 의미의 폭군이라고 할 만한 건 전무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에 불이 나자 네로가 그 광경을 감상하며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 대해 가장 관련있는 사료로 손꼽히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의 기록은 전혀 다릅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대화재 당시 네로는 로마 밖에 있었지만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네로는 급히 로마로 달려와, 황제로서 할 수 있는 방화 조치를 다했다고 합니다. 타키투스는 로마 대화재 당시 열 살 정도로, 자신이 살던 도시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나이였으며,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에게 목격담 등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음악을 감상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훨씬 후대의 사료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대화재의 책임을 증거도 없이 교도에게 돌린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지만, 네로 개인이 악의적인 행동을 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종교활동만을 고집하느라 로마의 전통적인 사회문화와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기독교도가 로마에 불만을 품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네로는 소문을 근거로 범죄자라고 판결하고 처결한 것인데, 엄연히 부당한 일이지만, 개인의 악의와는 거리가 멀지요.
네로는 황제다운 위인은 아니었습니다. 올림픽, 노래 경연 등 갖가지 행사에 참여하여 1등을 하는 것에 집착했고, 나라일은 거의 돌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당시의 실무 담당자는 꽤 유능했기 때문에, 국정 자체는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만, 황제가 좋게 말해 취미생활에 빠져 있고 나쁘게 말하면 나라일을 내버려두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만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결국 네로는 암살당하게 되지요.
하지만 네로 이후의 로마 제국 황제의 행보를 보면, 네로의 행보는 최소한 제국에 해는 끼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저절로 나옵니다. 네로는 취미 생활에 탐닉해서 국정을 내버려둔 정도였지만, 로마 제국의 사람들을 작정하고 탄압한 폭군이 이후로 여럿 나오니까요. 네로의 악행으로 꼽히는 기독교도 탄압을 예로 들면, 네로가 처형한 기독교도 숫자는 약 300명 내외 정도로 추산되지만, 네로의 시대보다 200년 뒤의 로마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1만 명 단위로 기독교도를 학살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네로가 기독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했다고만 통용되는 경우가 많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의 언급하지도 않고 있지요. 네로의 악명이란 대개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쿠오 바디스>는 역사를 왜곡한 작품이 되는 걸까요?
결과적으로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낭설을 널리 퍼뜨린 작품이 되기는 했지만, <쿠오 바디스>에서 묘사한 네로 황제는 역사왜곡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역사왜곡이라기보다, 오히려 역사적 자료의 취사선택 쪽에 훨씬 가까운 이야기지요.
<쿠오 바디스>의 네로 황제 묘사는, 작가가 상상해낸 것이 아니라, 로마 시대의 사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기원후 121년경 쓰여진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 De Vita Caesarum>이라는 책에서, 네로 황제를 희대의 폭군이자 작정하고 기독교를 탄압한 압제자로 묘사하고 있거든요. <황제 열전>은 네로가 로마 대화재 때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그 광경을 감상했다는 이야기가 거의 최초로 언급되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한국어 번역본은 <열두 명의 카이사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지요.
이 <황제 열전>은 얼마나 신뢰할 만한 자료일까요? 단적으로 말해서, <매천야록>보다도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애당초 역사서로 쓰여진 것도 아니었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일기처럼 기록한 에세이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 등 당시의 지배층이나 관련 정책에 대해 민중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도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공신력을 가진 역사적 증거로서는 한참 부족한 것들입니다. 어디까지나 이러저러한 소문이 돌았다 정도로만 쓰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매천야록>의 기록은 당시 민중들의 정서나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기본적인 역사서로서의 신뢰성은 떨어집니다. 예를 들면 <매천야록>은 명성황후가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사치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명성황후가 민중 사이에서 신망을 잃었다는 증거는 되지만, <매천야록>의 기록만으로는 명성황후가 정말 그런 사치를 저질렀다는 증거로는 부고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입증하려면, <매천야록>외에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당시의 행사 기록이나 조정에 있었던 사대부의 기록 등과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황제 열전>은 이런 측면에서 <매천야록>보다도 더 심합니다. <매천야록>은 그나마 시중에 도는 소문을 적은 것이지만, <황제 열전>은 거의 대놓고 자극적인 이야기로만 가득 채운 책이기 때문입니다. <황제 열전>을 당시의 역사 사료 등과 비교해 읽다 보면, 황색언론 같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입니다. 막연히 소문은 퍼졌지만 근거가 없거나, 때로는 딱히 그런 소문이 퍼진 적도 없는데, 로마 황제가 자극적인 만행을 벌이거나 갖가지 악행을 자행했다는 이야기가 잔뜩 실려 있지요. <황제 열전>은 황색언론이 흔히 그렇듯이 크게 성공했고,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웬만한 역사서의 내용보다도 훨씬 더 잘 알려진 사례도 여럿 있습니다.
<쿠오 바디스>는 네로 시기 로마 대화제와 네로 황제를 묘사하는 데에서, 타키투스의 엄정한 역사서 <연대기>가 아닌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을 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타키투스의 역사서를 원전으로 삼았을 때에 비해 훨씬 자극적인 소재와 전개를 많이 쓸 수 있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명작 소설을 남겼지요. 그리고 <쿠오 바디스>의 묘사를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동일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역사사료를 취사선택해야 하는 상황의 딜레마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도 잘 보여줍니다. 단지 옛날에 실제로 그런 기록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 기록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쿠오 바디스> 소설은 이런 사태에 책임이 있는 걸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쿠오 바디스>는 소설이며, 여러 자료 등 더욱 재미있는 소설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자료를 선택한 것뿐입니다. <쿠오 바디스>를 통해 네로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가 널리 알려졌다면, 그것은 소설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독자 쪽의 책임이 훨씬 크겠지요. 예술가는 아예 새로운 내용을 통째로 창작하기도 하며, 이 정도는 작가와 창작의 자유에 속한다고 봅니다. 정말 역사왜곡이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네로를 희대의 성군으로 그린 뒤, 네로의 적들이 네로에 대한 기록을 모두 조작했기 때문에 오늘날 폭군으로 알려졌다는 시나리오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요즘에는 역사적 재해석이랍시고, 거의 저 수준의 발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도 여럿 발표되고 있지만요.
이른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운운하면서 역사서의 기록 자체를 무시하려는 움직임도, 본질적으로는 이 딜레마와 상통합니다. 같은 사건이나 인물을 서로 다르게 쓴 기록이 여럿 있으니, 역사 기록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요. 하지만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옛날 기록 중에 못 믿을 것이 있으니 옛 기록 모두를 통째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보다 믿을 만한 기록을 판명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옛 기록을 맹신하는 것도 무조건 무시하는 것도 아닌 이런 태도야말로, 훗날을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역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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