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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통념과 실증적 진실의 간극

아리에시아 2015. 3. 20. 16:22

"프랑스 대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사치해서 일어났다."라거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백성들이 빵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말을 했다."라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저런 이야기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도 이제는 널리 알려졌지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역사적 상식'으로 통용되는 이야기 중에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에 적자가 쌓이면서 민중이 과도한 부담을 지게 되었고, 그것이 민중 봉기의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그 외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근본적 원인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성품이나 언행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비롯한 프랑스 대혁명의 진행 과정 전반(http://blog.daum.net/ariesia/48 참조)에 대한 것들도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수 있다-마리 앙투아네트의 악명 http://blog.daum.net/ariesia/40 "이라는 포스트에서 썼던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악녀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프랑스 정부가 적자 상태였던 것은, 루이 16세 이전 반 세기 넘도록 프랑스가 전쟁에 뛰어들면서 생긴 지출이 누적된데다가, 청부 제도로 세금을 걷으면서 세금의 태반이 정부가 아닌 세금 관리들에게 돌아가는 구조였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이해하기 싫어해서, 혹은 만만한 희생양에게 떠넘기는 것을 선호해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한 명에게 모든 원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후 백수십 년동안 희대의 악녀로서 선전되었으며, 대중도서에서 실제 모습에 대해 많이 다루게 된 오늘날에도 그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의 해악은 차라리 덜한 축에 속합니다. 딱히 잘못하지도 않은 희생양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끝났고, 나름대로 유익한 교훈도 있기는 하니까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희대의 악녀라는 신화는, "지도자는 모름지기 검소하고 민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교훈을 전해 주기라도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에는, 부유층 권력자는 서민들의 생활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지요.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 외에도, 역사적 통념과 실증적 진실이 완전 딴판인 사례는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역사적 의의나 사건의 진행상황 등을 완전히 바꿔버린 사례도 여럿 있지요.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표현은 창의적이고 기발한 착상을 뜻하는 관용어입니다. 저 표현에 대한 통념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콜럼버스 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지만,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고 바다를 건너면 언젠가 다른쪽 육지에 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아시다시피, 콜럼버스는 태평양을 건너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근대 유럽인이 되지요. 아메리카 대륙은 훗날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고, 에스파냐는 부유해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콜럼버스를 인정하기는커녕, 그냥 항해를 계속한 것밖에 없다고 폄하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달걀 끄트머리를 깨서 달걀을 세우면서, 달걀을 깨면 달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내는 것이 바로 업적이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콜럼버스가 정말 저런 말을 했을까요? 유명한 이야기기는 하지만, 콜럼버스 당대에 목격자에 의해 1차 문헌으로 기록된 자료를 없는지라, 실제로 있었다고 확신하기에는 애매합니다. 물론 없었다는 증거도 없지요.

 

하지만 이 신화의 진짜 문제점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들이 콜럼버스의 항해계획에 반대한 것이,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반대한 이유와는 딴판이지요. 당시 유럽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지구의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다를 빙 둘러 인도로 간다면, 육로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지구의 둘레가 약 1만 킬로미터이고, 아시아 대륙이 실제보다 두 배 정도 크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면 육로보다 빠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니 사람들이 반대할 수밖에요.

 

지구과학이나 그리스 철학에 대해 관심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지구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원전에 아리스타르코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 둘레가 약 46000킬로미터라는 계산을 했지요. 설사 중세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맥이 완전히 끊겼다 해도,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들이 발굴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상식으로 통용되던 곳이었으니,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겠다는 계획에 사람들이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콜럼버스의 계산은 오차가 너무나도 심해서, 콜럼버스가 일부러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치를 날조했다는 추측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는 수준이지요. 하지만 현재에는 콜럼버스 시대 사람들은 무지하여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으며, 콜럼버스는 그 무지를 깨뜨린 위대한 선각자라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콜럼버스의 도전정신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런 식으로 왜곡해서는 안 될 일일 텐데요.

 

 

종교가 지동설을 탄압했다는 신화도 있지요. 코페르니쿠스, 지오다노 브루노,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이 지동설을 주장하고 연구했지만, 카톨릭 교황청에서 지동설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주장이라면서 탄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종교권력을 내세워 지동설을 포기하라고 강요한 후, 갈릴레가 무력하게 승복하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위인전 등에 반드시 실릴 만큼 유명합니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화가,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플뢰리가 그린 <교황청 앞의 갈릴레이>입니다. 교황청이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지동설을 조직적으로 탄압했고,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는 신화의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종교란 과학 발전을 무조건 반대하고 탄압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지요. 하지만 이 신화도, 실제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당시 지동설이 수용되지 않은 것은, 초기 지동설은 천동설보다 오류가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지동설은 지구와 달, 여타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완벽한 원형으로 돈다고 가정했는데, 공전궤도가 원 형태라면 관측결과와 계산결과가 도저히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를 비롯해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지동설이 옳다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근거가 빈약한 엉터리 주장을 고집부린다는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었고, 실제로도 그런 반응이 대세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통찰력이 맞았지만요. 갈릴레이 이후 반 세기도 넘게 지나서, 요하네스 케플러가 공전궤도가 타원형이라는 것을 알아내자, 지동설은 관측결과과 이론적 예측이 완전히 들어맞는 이론이 됩니다.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탄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오히려 교황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연구했습니다.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재판정에 불려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위인전에서만큼 가혹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교황청에서 갈릴레이 재판이 열린 것도, 지동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황의 입지를 흔들기 위해 정적들이 교황의 후원자 중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는 주장이 우세합니다.

 

 

 

역사적 통념으로 통용되는 것과, 실증적으로 연구된 역사적 진실이 판이하게 다른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개중에는 사극에서 각색을 과도하게 한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사례도 있고, 아예 역사적 의의를 뒤바꾸어놓은 사례도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처럼, 유명한 말이 일명 역사적 일화에 같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유명해질수록, 오히려 진정한 진실은 묻히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