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전통파와 혁신파

18세기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륄리와 라모

아리에시아 2013. 12. 21. 11:30

18세기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전반적인 작품 경향을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대강 이렇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서정 비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겠지만, 일단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로 통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왕의 춤>으로도 유명한 작곡가 륄리는 18세기 전반의 프랑스 오페라 세계를 말 그대로 석권했습니다.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총애와 신뢰를 얻은 륄리는 다른 작곡가의 작품도 자신의 스타일을 따라야만 상연할 수 있게 하는가 하면, 엄격하고 복잡한 오페라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대로 작곡한 오페라만 상연할 수 있게 하기도 했고, 종국에는 자신 말고 다른 작곡가는 오페라를 발표할 수 없다는 왕의 칙령을 얻어내기까지 했지요. 처세술뿐만 아니라 음악적 역량도 있었기 때문에, 륄리의 작품은 많은 인기를 모았고 신봉자 수준의 팬도 많았습니다. 개중에는 왕의 총애를 받는 작곡가를 칭송하면 왕의 호의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상당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지만, 륄리가 당시 프랑스 오페라의 알파요 오메가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1987년 레 자르 플로리상에서 공연한 륄리의 <아튀스 Atys> 동영상입니다. 자막은 없고, 한글로 된 번역대본도 현재는 없습니다.

<아튀스>는 키벨레 여신의 사진인 아튀스가 약혼자가 있는 여성과 서로 사랑에 빠져, 여신의 신탁을 빙자하여 그 약혼을 취소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키벨레 여신은 사제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농락했다는 데 분노하여 아튀스의 눈을 멀게 만들고, 아튀스는 눈이 먼 상황에서 발광하다 연인을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고 자결하지요.

 

 

륄리의 독주를 뒤흔든 것은, 50세가 되어서 첫 작품을 발표한 라모였습니다. 원래 라모는 음악평론가이자 음악이론을 해설한 책을 집필한 위인이었는데, 쉰 살이 넘는 나이에 <이폴리트와 아리시>를 발표하며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세계에 등장하지요. <이폴리트와 아리시>는 라신의 연극 <페드르>를 원전으로 삼은 오페라입니다. 원전 소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파이드라-히폴리토스의 이야기입니다. 테세우스와 결혼한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의 아들인 히폴리토스에게 연심을 품게 되지만, 히폴리토스는 당연히 의붓어머니의 구애를 거절합니다. 하지만 파이드라의 유모는 파이드라를 구하기 위해 히폴리토스가 파이드라를 먼저 유혹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믿은 테세우스는 아들을 저주해 죽게 만들지요. 오페라에서는 히폴리토스가 신의 축복으로 되살아나는 해피엔딩이 추가되었고요.

 

라모의 이 데뷔작은 새롭고 참신한 음악이 밀도 있게 꽉 들어찬 작품으로서, 평범한 작곡가라면 <이폴리트와 아리시>에 쓴 음악만으로도 열 작품은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평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파격적이었던데다, 륄리가 정립한 오페라 규칙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떄문에, 지지자와 반대자가 치열하게 양립하게 됩니다.

 

라모의 데뷔작, <이폴리트와 아리시>의 2011년 공연 영상입니다. 프랑스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역시 한글 자막 영상이나 한글 번역 대본이 나온 적 없어서, 영상만 올립니다. 하지만 한글 텍스트 없는 영상만으로도, 두 작곡가의 작품이 얼마나 다른지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폴리트와 아리시>의 줄거리는 그리스 신화의 히폴뤼토스 신화와, 라신의 비극 <페드르>를 기본으로 합니다. 국왕 테제(테세우스)의 아들 이폴리트는 아버지가 멸망시킨 나라의 후계자나 마찬가지인 아리시를 사랑하는데, 테제는 이폴리트가 자신의 후처 페드르에게 추파를 던진다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에게 이폴리트를 죽여달라고 소원을 비는데, 그 이후 자신이 끔찍한 오해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하지만 신들은 이폴리트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고 생명을 주었으며, 아리시와 서로 재회하며 해피엔딩을 맞게 합니다.

 

<2015. 5. 2. 원래 있던 풀버전 영상이 삭제되어서, 동일한 공연을 수록한 다른 동영상으로 교체했습니다.>

 

 

륄리의 작품은 륄리가 정립한 엄정한 규칙을 따랐습니다. 연인 한 쌍과 신이나 요정 등의 연적이 등장하며, 아주 복잡한 인물들이 부차적으로 얽힙니다. 신과 요정, 마법사와 마녀는 서로 대립 구도를 이루고요. 당시 프랑스에서는 궁정발레, 희극, 비극, 목가 등이 인기를 궁정문화로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륄리는 이러한 여러 장르를 통합하고 조화시켰습니다. 륄리의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는 동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연극적인 경향이 아주 강하며, 음악 자체보다도 대사의 운율을 중시했습니다. 륄리의 오페라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노래하는 연극'이 될 것입니다.

 

이에 비해 라모는 음악의 비중을 대폭 늘렸습니다. 오케스트라 반주가 륄리의 오페라에서보다 더 풍부해지고, 훨씬 높은 빈도로 등장합니다. 륄리의 작품이 선율을 곁들인 연극 대사 낭송 같은 느낌을 준다면, 라모의 작품에서는 음악과 선율의 효과가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엄정한 양식을 정립한 륄리, 파격적인 혁신을 단행한 라모의 상반되는 작품 경향은 '전통적인 대가 vs 파격적인 신예'의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그리고 두 작곡가의 이런 상반된 경향이 '음악 애호가' 향유층과 맞물리면서, 그야말로 전국적인 화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라모의 작품은 륄리의 작품에 비해 음표가 훨씬 많았고, 음악이 작품 전반에 걸쳐 치밀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라모 지지자들은 라모의 음악이 륄리의 작품에 비해 훨씬 풍성하고 다채롭다고 호평했고, 륄리 지지자들은 라모의 작품은 음표를 과도하게 집어넣어 과유불급이 되었다며 혹평했지요. 라모 지지자와 륄리의 지지자들은 이런 식으로, '다른 스타일'을 우열관계로 단정지으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자신이 덜 좋아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반대파를 깎아내리는, 그런 풍조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에서, 이것은 비단 두 작곡가와 음악애호가만의 대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독선적인 작곡가 vs 그에 반발한 신진작곡가'의 대결이기도 했고, 륄리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곧 국왕을 칭송하는 것이며 라모의 작품을 좋아하면 그런 흐름에 맞서는 것이라는 분위기도 있었으며, 계몽주의자가 사상적으로 작품에 대해 논하는 등 토론과 사상적 측면에서도 활발한 논쟁을 촉발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라모의 작품을 두고 얼마나 격렬하게 논쟁했던지, 당시 프랑스 사교계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 자기소개할 때 자신이 라모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륄리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밝히면서 대화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부퐁 논쟁'이 시작되면서, 륄리와 라모의 작품은 같은 편으로 분류되어, 또다른 오페라경향과 나란히 대립하는 동지 관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