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는 대형 종교화를 주문받고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그림을 그린 덕택에, 주문자가 완성작품을 거절하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새로 그림을 그린 적이 여러 번 있었지요. 이 블로그에서도 <성 바울의 회심> http://blog.daum.net/ariesia/4 과 <성 마태의 영감> http://blog.daum.net/ariesia/6 두 사례에 대해 다룬 적 있습니다.
그런데 카라바조 작품 중에는, 주문자가 거절한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재제작 주문조차 하지 않고 그냥 끝나버린 사례도 있습니다. 바로 <성모의 죽음>입니다.
<성모의 죽음>은 1601년-1603년경 그려진 작품으로, 카르멜회 수녀회의 의뢰에 따라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진 작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성모 마리아가 죽음을 맞고, 주변 사람들이 그 광경에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오늘날 격정적인 슬픔을 처절하게 묘사한 명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완성된 직후 거절당합니다. 그리고 카라바조에게 재제작을 의뢰하지도 않고, 그냥 끝내버렸습니다.
카라바조가 완성한 <성모의 죽음>입니다.
카라바조가 물에 빠져 죽은 매춘부의 시신을 모델로 성모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기는 했습니다만, 설사 그런 이야기가 돌지 않았다고 해도 이 작품은 거절당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구도나 분위기가 너무나도 파격적이었으니까요. 예를 들면 성모는 다리를 드러내고 있고, 팔도 널부러져 있는 수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당시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그림이었습니다. 예전에 <라 보엠> 관련 글에서 언급한 적 있듯이, 19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여성이 다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22 그리고 팔이 널부러진 듯한 자세도 기품이나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모의 죽음을 소재로 그린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지지요. 구구절절한 교리 설명 없이, 관련 교리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해도, 같은 소재를 다룬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기만 해도, 카라바조의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티치아노가 성모의 죽음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표준적으로는 이렇게 그리는 것으로 통용되었지요. 성모의 죽음은 비단 한 개인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신성한 어머니로서 승천한다는 것이 교리였습니다. 이런 그림을 기대했는데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 같은 그림을 완성해왔다면, 당혹스러운 반응이 나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오늘날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은 격정적인 슬픔을 극적으로 담아냈다는 평을 받지만, 당대 관점에서는 거룩한 성모가 승천하는 장면을 웬 평범한 여자가 죽는 것처럼 범속하게 그려놓은 것으로만 보였을 겁니다. 천사도 하나님도 없고 승천한다는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으며, 웬 여자가 널부러진 자세로 죽은 걸로밖에 안 보였겠지요. 그리고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과 카르멜회 수녀회는, 카라바조에게 저 작품을 대신해 자신들의 지시사항을 반영한 새로운 그림을 주문하는 대신, 카를로 사라체니라는 다른 화가에게 새로운 제단화를 주문합니다. 그리고 사라체니가 그린 작품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성당의 제단화로 모셔졌습니다.
카를로 사라체니가 그린 <성모의 죽음>입니다.
사라체니의 <성모의 죽음>은 미술사에 자체적인 족적을 남길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는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을 대체한 작품으로 언급되는 일조차 거의 없지요. 카라바조의 작품은 당대 워낙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지만, 그냥 인수를 거부당했다는 것으로만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주문자가 유명한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고는 완성된 그림을 거절한 사례는 드물지 않았지만, 대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그림을 그리라고 재주문하는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결말이었습니다. 무명화가에게 주문했다가 다른 무명화가에게 재주문한 것도 아니고, 유명화가에게 주문했다가 훨씬 덜 유명한 다른 화가에게 재주문한 사례는 흔치 않으니까요.
미술사적으로 본다면, 카라바조의 <성모의 죽음>을 거절하고 사라체니의 그림으로 대체한 것은 다이아몬드와 돌덩이를 맞바꾼 수준의 실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 입장에서 본다면 이야기가 애매해지지요. 카라바조의 작품은 감상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지만, 당대 관점에서 종교 의식에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대목이 많기는 했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비단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작품의 진가를 주문자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일뿐만 아니라, 특정한 목표를 위해 제작된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목표를 위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높지만 원래의 목표와는 어긋난 작품을 만들었을 경우, 주문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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