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네덜란드 회화의 최고걸작으로 칭송받는 <야간순찰대>는 발표 당시에는 극심한 혹평에 시달렸고, 화가인 렘브란트의 예술적 활동에마저 큰 지장을 주었습니다. <야간순찰대> 이후 렘브란트의 예술적 경력은 지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은 대형 작품은 거의 없으며 자화상, 작은 크기의 소품, 판화 등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말년에 접어든 1660년경, 렘브란트에게 대형 회화작품을 그릴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찾아옵니다. 갓 완공된 암스테르담 시청사에 걸릴 그림을 그리던 화가가 죽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그림의 빈 자리를 채울 새로운 그림을 렘브란트에게 의뢰한 것입니다.
암스테르담 시청사의 현재 모습입니다. 현재는 '암스테르담 궁전'으로 불리며, 네덜란드 왕실의 주요 왕궁 중 하나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새로운 그림 의뢰에 의욕적으로 임했으며, 1662년 암스테르담 시청사에 걸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와 바타비아인들의 음모>로서,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실린 일화를 주제로 삼은 그림이었습니다. 클라우디으수 시빌리스는 고대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로마 속주의 인물로,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실상 혼자서 바타비아인들을 규합하고 이끌어서 로마와 맞서 싸웠으며, 로마와 휴전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그리고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를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던 당시 네덜란드의 상황에 비유하는 경향이 있었고, 암스테르담 시청사를 장식할 그림의 소재로 이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택했던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작품에서는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명암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긴박한 분위기를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와 바타비아인들의 음모>의 현재 모습입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작품은 암스테르담 시청사에 둥지를 틀지 못했습니다. 몇 달 후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와 바타비아인들의 음모>는 렘브란트의 수중으로 되돌려졌으며, 이 작품에 대한 계약금이 지불되었다는 서류 및 정황증거가 전혀 없기에,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 대해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불운은 거절당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이 작품은 캔버스의 절반 이상이 잘려진 채 미술시장에 나온 것입니다. 더 불운한 것은 이 작품이 잘리기 전의 모습을 담은 판화 등도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원래 모습은 렘브란트의 스케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렘브란트가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와 바타비아인들의 음모>를 구상했던 스케치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과 비교하면, 배경 부분이 대폭 잘려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암스테르담 시청사에서는 렘브란트가 새로 그린 그림을 시청사에 거는 대신, 기존에 주문했다가 화가가 사망해 미완성으로 남은 그림을 다른 화가에게 완성하도록 새롭게 의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그림이 호페르트 플링크가 그리고, 플링크가 죽은 후 미완성으로 남았다가 렘브란트의 제자인 위르겐 오벤스가 완성한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입니다.
화가 플링크가 죽어서 미완성으로 남았던 그림을, 사후에 오벤스가 완성시킨 <클라우디우스 시빌리스>입니다.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건물 안에전시할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당시 건축 형태에 맞춰 사각형이 아닌 윗부분이 아치형을 띤 화폭에 그려졌습니다. 명암을 강조한 렘브란트의 그림과 달리, 전체적으로 윤곽 표현이 뚜렷한 화풍입니다.
암스테르담 시청사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거절한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렘브란트의 화풍이 칙칙하게 보였을 것이기에 거절당했다는 설, 렘브란트에게 새로운 그림값을 지불하는 것보다 기존 미완성작을 마저 완성시키는 것이 예산이 적게 들었기 때문이라는 설, 렘브란트와 시청사 측 사이에서 마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 심지어 작품이 완성 직후 모종의 사유로 손상되었으며 작품을 잘라낸 것도 일차적으로는 손상된 부분을 제거했기 때문이라는 설까지 있지만, 추측만 분분할 뿐 구체적인 사료나 정황증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 주제 자체가 문제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과, 렘브란트에게 소정의 대금도 지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절반 이상 잘려나간 채 인물 부분만 남은 상태로 미술시장에 나온 시기는 렘브란트가 죽기 전이었기 때문에, 렘브란트 본인이 작품을 잘라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작품이 거절당했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원래 그림에서 절반 이상 잘려나간 그림만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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