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베르나르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그림은, 나폴레옹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도 눈에 익을 만큼 유명한 그림이지요. 이 그림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위풍당당하고 멋지게 묘사한 작품을 다수 남겼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림이 가장 유명하기는 하지만, 다비드는 당대 가장 유명한 초상화가로서 초상화도 다수 남겼습니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이 아닌 다른 인물을 그린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입니다.
이 초상화는 신고전주의 화풍의 진수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면서, 레카미에 부인이 주문을 취소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상화 완성이 늦어진다는 건, 진짜 이유가 아니라 핑계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초상화를 주문한 다른 사람들은 그림을 느리게 그린다는 이유로 취소한 사례가 전무한데다가, 레카미에 부인은 이 초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이유인즉슨 딱딱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라, 여성스러운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고 불평했다는 것입니다. 다비드가 초상화를 완성했어도, 어차피 다른 화가에게 새 초상화를 주문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지요.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건, 레카미에 부인은 다비드에게 주문한 초상화를 취소한 직후, 프랑수아 제라르에게 새로운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제라르는 곧바로 초상화를 완성했고, 레카미에 부인은 제라르의 초상화에 매우 만족했다고 합니다.
'여성스러운 매력을 어필하고 싶은 귀부인'의 입장에서는 제라르의 초상화를 더 선호한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일입니다. 다비드의 엄숙하고 위엄 있는 화풍은 이른바 여성스러운 매력과는 거리가 멀며, 부드럽고 평온하기보다 경직된 느낌을 주기 십상이니까요.
하지만 미술사적인 평가는 단연 다비드의 초상화 쪽이 더 높습니다. 제라르의 초상화는 화풍, 전체적인 구도와 붓터치 등이 흔한 초상화 유행을 따랐다는 평이 대세입니다. 제라르가 아닌 다른 화가였어도 충분히 그릴 수 있을 그림이라는 것이지요. 다비드만의 독보적인 화풍이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고 있는 다비드의 초상화에 비해, "작품성"이나 "예술성"의 평가는 낮은 축입니다. 어디까지나 다비드의 작품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제라르의 초상화도 작품 자체가 형편없다는 건 아니지만요.
다비드의 초상화가 미완성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초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을 보면, 과연 완성되었다면 어떠했을지,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미술사적으로 보면, 주문자의 기호에 맞추어 원래 주문을 취소하고 재주문하는 바람에, 초상화의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작품이 중단되고 좀 괜찮게 그린 범작이 나온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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