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의 대표적인 화가인 엘 그레코는 엄숙하면서도 장중한 작풍과, 현실과 천상 세계가 서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묘사한 성화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엘 그레코는 생전에도 인정받고 인기있는 화가였고, 마침내 에스파냐 궁정에서 성당 제단화를 의뢰하기에 이릅니다. 엘 그레코는 이 의뢰를 받아,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립니다.
엘 그레코가 그린 <성 마우리티우스와 테베 군의 순교>입니다.
성 마우리티우스는 3세기경에 살았던 이집트 출신의 로마 군인으로로, 287년에 순교한 기독교 성인입니다. 라틴어 식으로 이름을 읽으면 마우리티우스, 이탈리아어 식으로는 마우리치오, 영어로는 모리츠가 되는 기독교인으로서,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로마 신에게 제사지내는 절차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습니다. 이 때 마우리티우스를 따르던 테베군의 많은 군인들도 마우리티우스와 운명을 같이합니다. 에스파냐 궁정은 마우리티우스와 군인들이 순교하는 장면을 그려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엘 그레코가 이 주제로 완성한 작품에는, 엘 그레코 특유의 화풍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다소 어두침침한 색감을 통해 의연하고 숭고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천상 세계의 천사들이 순교한 성인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는 엘 그레코만의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화풍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엘 그레코는 이 작품에서, 마우리티우스와 테베군들이 처형을 앞두고 의연하고 담담하게 행동하는 장면을 정면에 크게 그렸습니다. 순교하는 장면은 작품 뒤쪽, 배경에 가까운 곳에 작게 그렸지요.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에스파냐 궁정은 이 작품을 거부하게 됩니다. 에스파냐 국왕이던 펠리페 2세가 순교 장면이 작게 그려졌다는 이유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것으로 이 작품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 궁정에서는 다른 화가에게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새로 의뢰합니다.
엘 그레코를 대신할 화가로 낙점된 화가는 로물로 친친나토였습니다. 친친나토는 표준적인 규범으로 통용되던 것들을 곧이곧대로 따른 그림을 그렸고, 이 작품이 원래 계획되었던 엘 그레코의 작품 대신 성당 제단화로 선택됩니다.
로물로 친친나토가 그린 <성 마우리티우스와 테베 군의 순교>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오늘날 기억되는 거의 유일한 친친나토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엘 그레코의 작품을 대신해 선택되었다는 곁다리 일화 덕에, 언급된 된다는 쪽에 가깝고요. 기술적으로 못 그린 그림은 절대 아니며, 정교한 디테일은 꽤 괜찮은 편이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식의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에스파냐 궁정이 엘 그레코의 <성 마우리티우스와 테베 군의 순교>를 거부한 사건은, 작품 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 그레코는 이 일을 계기로 궁정의 후원을 받아 작품활동을 하는 길을 포기하고, 에스파냐 수도인 마드리드가 아닌 옛 수도이자 자신이 활동했던 톨레도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엘 그레코의 작품에는 고대 세계를 주제로 그린 그림의 배경 풍경에 톨레도 정경을 그려넣는 등, 톨레도라는 도시가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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