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과학의 만남/역사를 밝힌 과학

수천년 전의 화재 사건, 트로이와 아방궁

아리에시아 2015. 5. 2. 11:42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트로이 전쟁에 대해 읊었습니다. 호메로스는 트로이는 더없이 풍요롭고 수많은 보물을 지녔던 도시였지만, 그리스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하여 도시 전체가 불탔다고 했습니다. 독일의 사업가 슐리만이 어렸을 때 트로이 이야기를 보고 트로이를 발굴하겠다는 꿈을 키워, 마침내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위인담이자 유럽고고학발굴의 효시이기도 합니다. 이면을 보면 슐리만은 21세기 기준으로는 도굴꾼 수준으로 유적을 험하게 다루었고, 발굴된 옛 장신구들을 아내에게 착용시키고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는 등, 미담이나 성공담으로만 보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많기는 하지만, 선구자적인 업적 자체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슐리만은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이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라고 추측했고, 히사를리크 언덕을 파내려가 옛 유적을 발굴하는 데 성공합니다. 슐리만 이후로도 이 유적은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연구되었으며, 모두 아홉 층의 도시 유적이 겹쳐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시가 있다가 폐허가 되면 그 위에 새로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가 폐허가 되면 또다시 그 위에 새로 도시를 건설하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천여년에 걸쳐 청동기 시절의 유적 아홉 곳이 같은 장소에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고고학 발굴에 따른, 트로이의 9개 층 유적 도해입니다. 그린이는 타운센드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이 중에서 호메로스가 노래한 시기의 트로이는 이른바 '트로이 6층', 혹은 '트로이 7층' 쪽입니다. 거의 동시기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구획하기가 어렵습니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1250년경에 이 도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추측합니다. 트로이에서 생산된 것과는 다른 그리스식 무기 파편 등이 다수 발견되었고, 격렬한 전투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여럿 있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트로이가 패배하면서 트로이 도시가 화염에 휩싸였다고 묘사되는데, 실제로 그 시기에 화재가 있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트로이는 화염에 휩싸여 사라졌고 전설이 되었으며, 문학작품에 힘입어 후대에 길이길이 기억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까마득한 옛날에 파괴되어 사라졌지만, 전설이 되어 길이길이 전해진 유적은 여럿 있습니다. 동양권에서도 이런 유적이 있으니, 바로 아방궁입니다. 아방궁은 파괴된 지 2천여년이 훨씬 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호화롭고 거대한 궁궐이나 궁궐 같은 집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아방궁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워,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제가 지은 궁입니다. 진시황제는 무덤과 궁을 지극히 호화롭고 장대하게 지었는데, 병마용갱이 바로 진시황제의 무덤을 위해 만든 문화재입니다. 병마용갱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 수천 점의 실물 크기 군인 흙인형과 각종 무기 등을 부장한 유적으로, 아직 전체를 다 발굴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방대한 유적입니다. 흙인형이 내세에서 무덤의 주인을 지킨다는 믿음 하에 조성된 것인데, 하나하나 빚어서 서로 다른 얼굴로 진짜 인물처럼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현대 중국에서 조성한 진시황의 석상입니다. 진시황을 묘사한 당시 초상은 남아있지 않고, 후대에 상상해 그린 도상만 전합니다.

 

 

무덤을 이토록 장대하게 지은 진시황제는, 자신이 기거할 궁도 지극히 호화롭게 짓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 궁을 일러 아방궁이라 했지요. 진시황이 죽은 후 백여년이 지나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방궁의 규모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마천의 기록을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아방궁은 동서로 약 650미터, 남북으로 약 12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이토록 장대한 궁궐이었으나, 진시황제는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진시황제가 죽고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진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아방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나라가 기울자 천하는 군벌이 난립하는 시기가 몇 년 동안 지속되다가, 유방과 항우의 두 명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이 때 항우가 아방궁이 있는 지역을 점령한 뒤,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아방궁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일부러 불태웠는데 무려 3개월이 지나서야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지극히 화려한 궁궐이 전쟁의 승자에 의해 불태워지는 장면은 너무나도 극적이어서, 두보의 <아방궁부> 등 많은 작품에서 이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아방궁 터를 현대 과학으로 면밀히 조사한 결과, 화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사실무근인 것일까요? 역사학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추측을 내놓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실무근의 헛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방이나 유방의 후손이 항우를 비방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혹은 항우는 난폭하고 감정적으로 통치해서 민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런 이미지가 반영되어 아방궁을 파괴했다는 소문이 생겼을 수도 있고요.

 

다른 하나는 아방궁이 워낙 유명하고 상징적 의미가 크다 보니,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서 인기를 끌었고, 어느새 문학적 표현이 실제 역사처럼 자리잡았다는 것입니다. 훗날 문학작품에서 백제 의자왕이 많은 궁녀를 두었다는 의미로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어느새 의자왕이 정말 삼천 명의 궁녀를 두었다는 이야기로 퍼지게 된 것처럼요. 부연하자면 당시 기록에 의자왕이 삼천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는 언급은 전혀 없고, 발굴된 백제 왕궁 터의 규모로 3천 명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작기에, 3천궁녀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마지막으로 항우가 아방궁이 아닌 다른 궁궐인 함양궁을 불태웠다는 것이 와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함양궁 터를 발굴하고 아방궁 터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토질을 조사했더니, 이천여년 전에 큰 화재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수천년 전에 버려진 유적지에서 화재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어떻게 수천년이 흐른 오늘날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요?

 

현대과학 중 지질학은 흙을 분석하는 학문입니다. 누가 흙을 뒤엎지 않은 이상, 흙이 쌓여 있으면 그 흙이 쌓이기 시작한 이래의 역사를 고스란히 순서대로 담고 있습니다. 화재가 일어나면 재가 바닥에 쌓이고, 화재와 재는 바닥에 쌓여 있는 흙에 고스란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불탄 흔적과 재는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 쌓이게 되니까요.

 

이 흔적을 말끔히 치우고 새 건물을 지었다면, 그 흔적은 남아있지 않겠지요. 하지만 옛날 유적 중에는 큰 불이 나면, 깔끔하게 치우고 새 건물을 짓는 경우보다, 힘에 부쳐서건 재건할 상황이 안 되어서건 방치해서 세월의 흐름에 맡겨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방치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새 흙이 쌓여 원래 유적은 겉으로는 묻히지만, 땅 속에는 그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지질학은 지극히 정밀하게 발전했기 때문에, 설사 불탄 곳의 흔적을 일부러 치우고 새 건물을 지었다고 해도, 흙을 통째로 퍼내지 않은 이상 화재가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아방궁을 예로 들면, 1제곱미터마다 다섯 개의 탐침을 꽂아 토질을 분석해, 수천년간 그 땅에서 화재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트로이와 함양궁에서도, 그리고 다른 수많은 유적지에서도 같은 원리를 활용했지요. 현재 과학기술로 수천년 전에 그 땅에서 대형 화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충분히 규명할 수 있으며,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현재는 밝혀낼 수 없는 새로운 것들도 밝혀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과학기술의 승리이자, 역사학 및 고고학이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