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이 전쟁 등에 휘말려 죽는 사례는 많았고, 어린 왕족이 그 와중에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왕족이 죽었다고 알려지면, 얼마 후 그 왕족을 사칭하는 사람이 나오는 경우도 많았지요.
이런 사칭자들이란, 대개 생전에 왕족을 만나본 사람이 몇 번 이야기를 나누기만 해도 가짜라는 게 들통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맞물려 나름대로 왕족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요. 러시아의 가짜 드미트리,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요크의 마거릿 등이 그 예입니다. 러시아의 가짜 드미트리는, 가짜라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했지만, 당시 러시아에 반대하고 대적하는 무리가 왕족으로 대접하며 구심점으로 삼았지요. 요크의 마거릿은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 형제의 누이인데, 헨리 7세(헨리 8세의 아버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할아버지)가 리처드 3세를 무찌르고 잉글랜드 왕이 된 이후, 죽었다고 알려진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조카가 맞다고 인증해주며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어도, 사칭자가 오랫동안 추종자를 거느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러시아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생존설과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 생존설은,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당사자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회자되며 미스테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수수께끼는, DNA 검사라는 과학 덕택에 마침내 의문의 여지 없이 풀리게 됩니다.
1911년에 찍은 러시아 황실 가족 사진입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외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황녀가 바로 네 번째 딸인 아나스타샤 황녀입니다.
러시아 로마노프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에게는 네 명의 딸과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섯 아이는 순서대로 올가 황녀, 타티아나 황녀, 마리야 황녀, 아나스타샤 황녀, 그리고 알렉세이 황태자였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황실은 작은 마을로 유폐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러시아에서는 황실 일가를 총살했다고 공식발표를 합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은밀히 처형한데다가, 시신도 공개되지 않았는지라, 공식 발표 외에 황실 일가가 사망했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족 일가가 정말 처형당한 것은 맞는지, 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왕족은 없는지, 이런 의문이 나돌며 소문으로 퍼지지요.
자신이 처형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러시아 황족을 사칭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은 이내 거짓이 폭로되었지만, 한 명만은 오랫동안 미스터리 서적에 오르내릴 정도로 끈질기게 왕족 행세를 했지요. 일명 안나 앤더슨으로 알려진 여성입니다.
1920년에 나타나 1984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아나스타샤 황녀라고 주장했던, '안나 앤더슨'의 사진입니다.
안나 앤더슨이 진짜 아나스타샤 황녀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졌습니다. 아나스타샤를 만난 적 있는 사람 중 안나 앤더슨이 황녀라고 증언한 사람도 있다는 것과, 러시아 황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 근거가 되었지요. 이 '근거'에 대해서는 이미 반박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나스타샤를 본 적 있으면서 안나 앤더슨이 아나스타샤가 맞다고 주장한 경우는 대개 두 가지였는데, 아나스타샤를 여러 해 전 몇 번 본 것이 고작인 사람이 기억 속의 아나스타샤와 닮아 보이기는 한다는 정도의 증언을 했거나, 안나 앤더슨이 아나스타샤 황녀가 맞으니 러시아 황실의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면서 소송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첫 번째에 속한 사람들의 증언은 도대체 신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돈을 목적으로 안나 앤더슨을 내세웠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했지요.
반면 안나 앤더슨이 러시아 황녀일 수 없다는 증거는 차고 넘쳤습니다. 극소수 몇몇을 제외하고 아나스타샤를 본 적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나가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는 증언을 했고, 안나 앤더슨은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황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안나 앤더슨에게는 러시아 황실 유산 소송을 노리고 몰려든 황실 관계자가 여럿 있었고, 그 황실 관계자들이 안나에게 러시아 황실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었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실제로 러시아 황실 유산 소송에 동참한 안나의 지지자들은 '어릴 적 아나스타샤 황녀와 단둘이서 이런저런 해프닝을 겪은 적이 있는데, 안나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라는 것을 진짜라는 증거로 내세우고는 했지요. 러시아 황실 유산도 사실무근입니다. 러시아 황실의 유산 대부분은 이제 공산국가가 된 러시아 안에 있었고, 해외에 있던 예금과 재산도 대부분 러시아로 환수된 상태였으니까요. 안나 앤더슨이 아나스타샤로 인정받는 것이 요원하다는 건 둘째치고, 상속받을 재산 자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소송을 핑계로 돈을 끌어모으려는 사기였다는 해석까지 있는 판국입니다.
그렇다면 안나 앤더슨은 누구였을까요? 안나 앤더슨이 나타날 무렵, 공장에서 일하던 프란치스카라는 폴란드 여성이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안나 앤더슨 반대파들은 프란치스카의 외모가 안나 앤더슨과 굉장히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나 앤더슨이 곧 프란치스카라고 주장합니다. 안나 앤더슨이 1984년 죽을 때까지 안나가 프란치스카라는 것은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못했고, 결국 아주 개연성 높은 가설로만 남았지만, 안나가 아나스타샤 황녀일 가능성보다는 여러 모로 훨씬 높았습니다.
이렇게 진짜라는 증거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가짜라는 증거는 차고 넘치는 판국이었지만, 안나 앤더슨이 진짜 아나스타샤일지도 모른다는 미스터리는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말 DNA 검사를 통해, 안나가 아나스타샤가 아니며 아나스타샤는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는 것이 확고부동하게 입증됩니다. 1991년 러시아 황실 일가로 추정되는 유해 무더기가 발견되었고, 2007년 두 구의 유해가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 유해들을 로마노프 황실의 친척과 DNA 대조를 해 보니 로마노프 일가가 맞다고 증명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실종되었던 프란치스카의 조카와 안나 앤더슨의 DNA를 대조해보자, 의심의 여지 없는 친척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역사적 연구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안나 앤더슨이 아나스타샤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란 물증이 없다면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해도, 절대 아니라고 단정하지는 않는 학문입니다. 이런 태도를 '희박하나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실일 것이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왕왕 있기도 하지만요. 그 이전에는 역사학적 관점에서 '개연성이 없다'였다면, 과학의 발전은 '절대 아니다'라고 입증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젠 그 어떤 시나리오를 꾸며내더라도, 안나 앤더슨이 아나스타샤가 아니며, 아나스타샤는 가족과 같이 처형당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DNA 검사가 생존설 역사적 미스터리를 해결한 사례가 또 있으니, 루이 17세 생존설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16세 일가는 유폐되었습니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자, 공주 마리 테레즈와 왕세자 루이는 학대당하다시피 방치되는 신세가 되지요. 루이 16세가 죽자 왕당파는 왕세자 루이를 루이 17세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루이 17세는 갇힌 소년 죄수 처지였습니다. 루이 17세의 처지는 암울했는데, 자료마다 다르지만, 처지가 가장 나았다는 자료도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못한 채 방치되었다는 내용이며, 상황이 나쁜 자료의 경우 얻어맞는 등의 학대를 당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루이 17세가 열 살 되던 해, 루이 17세가 죽었다고 발표됩니다.
왕세자 시절 루이 17세의 초상화입니다.
훗날 프랑스에 왕정이 복고되어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가 즉위하자, 루이 17세는 사실 다른 소년과 바꿔치기되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나돌게 됩니다. 루이 17세를 사칭하는 사람도 정말 많았지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서도 루이 17세 사칭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루이 17세는 과연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에서 죽었을까요? 확실한 것은 한 소년이 죽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공동묘지에 내던져지듯이 장례식을 치렀기 때문에, 루이 17세의 시신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루이 17세라는 소년이 감옥에서 죽은 뒤 감옥에 있던 한 사람이 시신에서 잘라낸 머리카락 한 묶음과, 시신에서 적출해 보존처리했다고 알려진 심장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루이 17세 사칭자들은 증언을 약간 대조하는 것만으로도 곧 거짓이 폭로되었으나, 한 명만은 여러 차례의 검증에도 살아남았습니다. 나운도르프라는 사람이었는데, 안나 앤더슨처럼 돈을 목적으로 몰려든 관계자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루이 17세 생전의 친지들의 검증을 거의 통과했습니다. 누나 마리 테레즈만은 루이 17세가 죽었다며 나운도르프를 만나는 것을 끝끝내 거부했지만, 어릴 적 친구, 시녀, 귀족 등 많은 사람이 나운도르프가 루이 17세가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외모도 닮았고, 루이 17세의 어릴 적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다면서요. 그리고 나운도르프의 후손은 대대로 나운도르프가 루이 17세이며, 자신들은 프랑스 국왕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번에도 DNA 검사가 진실을 밝혀주었습니다. 나운도르프의 시신에서 추출한 DNA와 루이 17세의 친척의 DNA를 대조했는데, 전혀 맞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루이 17세로 알려진 소년'이 죽은 뒤 시신에서 잘라낸 머리카락과 적출했다는 심장의 DNA를 대조한 결과, 둘 모두 루이 17세 친척의 DNA와 친척관계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루이 17세는 프랑스 대혁명 때 감옥에서 소년 죄수로서 죽었던 것입니다.
나운도르프가 대체 누구였을지, 안나 앤더슨처럼 왕실 유산을 노리고 몰려든 추종자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프랑스 왕실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시시콜콜한 어릴 적 에피소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헤어진 사람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증언, 그것도 어릴 적에 헤어져 성인이 된 뒤 다시 만난 기억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고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루이 17세는 프랑스 대혁명 때 10살의 나이로 죽었다는 것과, 나운도르프는 프랑스 왕실과 전혀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미스터리 외에도, 친자 여부로 역사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가 DNA 검사로 입증된 사례는 많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하녀가 여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친부가 제퍼슨이라는 추측이 오랫동안 있었는데, DNA 검사 결과 제퍼슨과 친족관계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나폴레옹 조카, 정확히 말하면 나폴레옹의 남동생과 나폴레옹의 첫째 부인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하기 전 첫째 남편에게서 낳은 딸이 결혼해 낳았다고 알려진 나폴레옹 3세가 나폴레옹과 혈연관계가 없으며, 친부가 나폴레옹의 남동생이 아니고 나폴레옹과 혈연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지요.
이런 지엽적인 한두 명 외에도, 민족집단의 DNA를 분석해 어느 지역에서 어느 시기에 이주하고 섞이게 되었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등, DNA 검사가 밝혀낸 역사적 사실은 많습니다.
'역사와 과학의 만남 > 역사를 밝힌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주고구려비와 레이저 판독 기술 (0) | 2015.07.11 |
---|---|
수천년 전의 화재 사건, 트로이와 아방궁 (0) | 2015.05.02 |
신라 천마도는 기린인가 천마인가, 현대과학의 대답 (0) | 2015.04.11 |
윤두서 자화상의 본래 모습, 적외선 촬영이 밝혀내다 (0) | 2014.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