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에는 '동유럽의 루브르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전시관이 한 곳 있습니다. 토피치 미마라라는 크로아티아인이 자신이 소장하던 '문화재' 수천 점을 국가에 유증했고, 그 기증품을 토대로 '미마라 미술관'이 건립됩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미마라 미술관이 방대하고 수준 높은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고 여겨, 동유럽의 루브르 박물관이라고 부릅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동유럽의 루브르'로 부른다는 미마라 미술관 전경입니다. 박물관 건물만큼은 루브르 못지않은 위용을 보여줍니다.
이 미마라 미술관은 그야말로 방대한 수집품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부터 19세기 말의 유럽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이슬람과 중국 등 아시아권의 '문화재'도 다수 있습니다. 게다가 유명 화가의 스케치와 작품 초안도 많이 소장되어 있지요. 미마라 미술관의 소장품은 4천여 점에 가까운 방대한 규모입니다. 이 작품들이 진품이라면, 정말 대단한 수집품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중 진품은 얼마 되지 않으며, 얼마 되지 않은 진품도 오래되기만 했지 문화재적 가치는 별로 없는 작품들입니다. 대부분은 미마라 자신이 위조한 가짜 문화재입니다. 위작이 정교하게 만들어지기라도 했으면 몰라도, 약간의 소양만 있으면 위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위조했다는 점에서도 비웃음을 사고 있지요. 예를 들 미마라는 유명 화가의 작품을 위조할 때, 그 화가의 화풍과 비슷하게 그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자기 손이 가는 대로 그린 뒤 서명만 위조했습니다. 이런 허술한 사기가 들키지 않을 리가 있나요.
하지만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미술관을 그야말로 국가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위용 넘치는 건물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지원을 하고 있으며, 이 미술관이 소장품이 가짜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학살하지 않은 사건 중 국수주의의 폐해가 드러난 외국 사례를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전 미마라 미술관을 들 것입니다. 국수주의가 도그마가 되어버리고, 진실을 국익이라는 이름 하에 묻어버리는 것이 애국으로 묘사되고 있고, 덕분에 오히려 진실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저 거대한 미마라 미술관의 '소장품'을 보호하는 데 드는 예산을 다른 곳에 쓴다면, 얼마나 유용하겠습니까?
처음에 저 박물관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웬만해야 분개하든 말든 하지,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왔찌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의 자존심'이라는 미명 하에, 가짜를 가짜라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비단 이 미술관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민족주의가 없던 '신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너무나도 흔합니다. 그것을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사실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지요. 그 '신화'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거나, 그것이 가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제가 그것을 처음 의식하게 된 것은, 아인슈타인 첫째 부인의 '신화'를 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는 그야말로 손꼽히는 실력이 있었지만, 수학은 대학 시절 흥미를 잃고 시험 칠 수 있을 만큼만 벼락치기 공부를 했기 때문에, 물리학에 비해 수학 실력이 뒤처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논문을 쓸 때,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을 받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인슈타인의 대학 동창이었던 첫번째 부인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 논문의 수학적 정리를 담당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됩니다.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신화'는 널리 퍼져 있으며, 심지어 위대한 남성 학자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 과학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에서 물증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도와 준 사람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밀레바가 자신의 논문을 도왔다는 언급을 한 것은 대학 졸업 이후에는 없습니다. 그로스만에 대해서는 어떤 논문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고, 그에 대해 감사한다는 글을 남겼는데, 첫째 부인에게는 그런 언급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비슷한 증언이 있기는 한데,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아인슈타인 지인인데, 그 사람 말로는 아인슈타인 부인이 아인슈타인을 도왔다 카더라'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공동연구의 정황이 조금이라도 보인 것은,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의 연구논문뿐입니다. 하지만 밀레바 마리치는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한 술 더 떠 정말로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 과학자들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데 활용되기도 합니다.
과학 역사에는 뛰어난 여성이 업적을 쌓았지만, 주변의 남성 과학자에게 빼앗긴 사례가 많습니다. 조슬린 벨은 펄서를 발견했지만, 그 업적은 스승인 휴이시가 독차지했고 조슬린 벨은 노벨상 공동수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리제 마이트너는 핵분열을 이론적으로 창시했으나, 핵분열 발견에 노벨 화학상이 주어질 때 마이트너는 물리학자이며 망명 중이라 공식적으로 논문에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는 이유로 제외됩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정밀한 사진을 찍었지만 보다 신중하게 연구하느라 발표를 미루고 있는 사이, 연구소 상사가 자료를 빼돌려 외부 연구자인 클릭과 왓슨에게 보여주었고, 클릭과 왓슨은 프랭클린의 자료를 반쯤 끼워맞추다시피 DNA구조를 만들어 성급히 발표합니다. 정밀한 자료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발표한 것이라 당시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들어맞았기에 클릭과 왓슨은 DNA 연구의 선구자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 둘은 그 논문이 과학적 원칙을 지키지 않은 성급한 날림 논문이었다는 것도, 프랭클린의 자료를 몰래 보았기에 그 논문을 쓸 수 있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프랭클린을 요상하고 신경질적인 여자로 묘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밀레바 마리치 이야기를 들면서 그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이 과장된 것이라는 반박과 맞닥뜨리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밀레바 마리치도 증거가 없는데 업적을 남겼다고 우기고 있으니, 그 여성 과학자도 마찬가지겠지."라는 식으로요. 이런 일이 여러 번 생기다 보니, 전 짜증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여성우월주의자가 떠받드는 저 신화, 막상 진짜 여성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저 신화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생긴 거냐고요.
훨씬 나중에야 그 부인이 세르비아 출신이고,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 출신의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을 적극 도왔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남자를 깎아내리기만 하면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칭 페미니스트', 혹은 극단적 여성우월주의자가 밀레바 마리치 신화를 워낙 떠받드는 통에 묻혔지만, 처음에는 국수주의에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어머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모두 동유럽, 그것도 옛 유고슬라비아 쪽이군요. 그럼 이처럼 거짓 신화를 만드는 국수주의 풍조는, 동유럽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희박한 전설 같은 것을 토대로 국수주의적인 '신화'를 만들어내거나, 심지어 희박한 전설조차 없는 상황에서 아예 신화를 통째로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요. 그런 것을 나라와 민족의 자존심 운운하며 떠받드는 일도 많지요. 이쯤 되면 사극작가가 만든 묘사를 진짜 역사로 믿어버리는 건 순진해보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화는 진실을 규명하는 데 발목을 잡게 됩니다.
미마라 미술관은 미술관과 소장품이라는 '물적 형태'로 존재하고 있기에 유난히 눈에 띌 뿐, 국수주의와 국익이라는 미명 하에 버젓한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킨 사례는 너무나도 많지요. 그것을 지적하는 것을 반역죄 취급이라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전 미마라 미술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저런 일이 많은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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