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창작한 예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 첫번째 출처는?

아리에시아 2014. 8. 2. 11:55

모차르트가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은 꽤 널리 퍼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 범인이 '안토니오 살리에리'라는 당대의 음악가였다는 소문도 굉장히 유명하고요. 영화 <아마데우스> 덕에 훨씬 유명해진 소문이기는 하지만, 그 영화가 나오기 전에 이미 백여년 동안 회자되던 소문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살리에리가 그럴 이유도 동기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그럴 리 없다"고 학계에서 단언한다는 건, 그럴 이유가 없다는 증거는 그만큼 넘쳐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모차르트가 죽었을 때에는 독살설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검시했을 때는 모차르트는 병으로 죽었다고 나왔으며, 독물 같은 건 전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굳이 끄집어낸다면, 모차르트가 몸 상태가 갑자기 너무 나빠지자, "어디서 독이라도 먹은 건가, 갑자기 몸 상태가 왜 이렇지."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게 전부입니다.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해요. 진지하게 독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면, 당장 해독제를 구하러 다녔겠지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위인이었냐는 것에도, 역사가들은 회의적입니다. 살리에리는 그럴 위인도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에야 모차르트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지만, 당시에는 살리에리의 작품이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오늘날의 인식과 달리 당대에는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차르트 생전에 인기를 끈 오페라는 <마술피리>와 <후궁 탈출> 정도고, 다른 오페라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더랬습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교육이라고는 음악 교습만 받아서 사회성, 경제관념, 사교계 예법 등이 먹통 수준이었는데, 이 역시 모차르트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살리에리는 당시 상류층 사교계의 기호에 훨씬 잘 맞는 작품을 연이어 내놓았으며, 사교성도 좋았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예술가에게는 무료로 음악 교습을 앞장서서 해줄 정도로 인품도 좋았고요. 게다가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직접 대립하던 관계도 아니었습니다. 궁정 살롱에서 축제 이벤트의 일환으로 음악대결같은 걸 한 적은 있는데, 그게 전부입니다. 살리에리에 대해 조금만 알아보면, 이렇게 독살음모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 독살범으로 지목되었다는 게 황당해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모차르트 독살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젊은 나이에 아깝게 죽은 인재에게 타살설 음모론이 도는 건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다 치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살리에리가 그리 구체적으로 범인으로 지목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쓴 최초의 출처는 어디이며, 무엇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지어낸 걸까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 구절을 한 번씩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이 쓴 시의 첫 구절이지요. 푸슈킨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짧은 희곡이 있습니다. 1830년에 발표된 이 희곡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며, 모차르트의 죽음을 바라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차르트의 작품을 능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분노하고, 질투하고, 마친내 고뇌하다가 독살 단계까지 가 버리는 거지요. 살리에리가 독을 집어넣고, 오늘따라 몸이 안 좋다고 말하는 모차르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납니다.

 

그런데 러시아인, 그것도 황제의 감시를 받으며 사실상 감금된 푸슈킨이 먼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밀한 내막을 알았을 리 만무합니다. 말 그대로 실존인물의 이름만 빌린, 완전한 창작입니다. 또한 모차르트에 자신을 이입했다는 해석도 많습니다. 천재가 억울하게 핍박받다가 짓밟히고 마는 이야기를 쓰면서, 그렇게 짓밟히는 천재에 자기 자신을 대입했다는 거지요. 그래서 악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차르트 주변의 인물 이름을 적당히 집어넣은 거고요.

 

만약 러시아 문화의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전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이 이토록 널리 퍼진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가 지어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연원도 없는 이야기가, 이렇게 널리 퍼졌는걸요. 플라톤의 이야기말고는 문헌이나 자료나 실존증거가 아무 것도 없는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이토록 유명한 것을 보고, 플라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실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그럼 푸슈킨은 만난 적도 없는 살리에리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지어낸 걸까요?

 

답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오히려 그런 게 가능했다는 겁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초상화입니다. 러시아어 문학작품을 쓴 거의 최초의 러시아 작가이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문학 분야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며, 러시아 오페라 중에서도 푸슈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많습니다.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예브게니 오네긴>,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금계>등의 오페라는 푸슈킨의 작품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오페라로 작곡했지요.

 

 

 

이 황당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선 수백 년 전의 창작 풍토부텨 살펴봐야 합니다.

 

중세 러시아 문학작품을 정리해 다룬 <중세 러시아 문학(11~15세기)>에서는, 해설 챕터에서 중세 러시아 문학에 대해 크게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소재만을 다룬 종교성, 작품의 '역사성', 필사본 형태로 출간된 것, 작가의 익명성, 문헌을 다루는 텍스트학이 유난히 발달한 것입니다. 이 중 두 번째인 작품의 역사성이란, 해당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중세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나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쓰였다. 중세 문학작품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허구 소설의 개념이 거의 없다.'(<중세 러시아 문학(11~15세기)>, 드미트리예프 엮음, 조주관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판, 13페이지)

 

즉, 러시아에서는 중세 수백 년 동안,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이야기를 꾸미는 것이 문학의 전형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중세 유럽의 문학과 비교해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유럽에서는 중세 이래 수백 년 동안,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죄악시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이미 있던 이야기를 더 재미있고 멋있게 만들어내는 건 얼마든지 허용되어도, 자신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허튼소리를 지어낸 것처럼 취급했지요. 중세 서사시에는 거의 예외없이 그 작품이 어떤 원전에서 비롯했다는 소개구절이 들어가는데, 이런 문화풍토 때문입니다. 예외라면 성인이나 성녀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을 때 정도인데, 여기서는 공경하자는 메시지가 작품성이나 재미보다 우선하니 경우가 다릅니다. 

 

만약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가공의 인물과 작품을 내세워서 "사실은 이런이런 사람이 해 준 이야기를 나 혼자 들은 것이지, 절대로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라고 우기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는 베넹헬리라는 사람이 쓴 글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있기에,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식으로 작가가 언급합니다. 작품 본편에서 원고가 없는 부분은 베넹헬리의 글에서 가져왔다고 말하는가 하면, 베넹헬리라는 이름은 아예 본편 소제목에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이 베넹헬리라는 인물 설정은, 이런 중세 서사시 문화를 패러디하는 것이지요.

 

이 가공의 작가 때문에, 그 작가를 실제로 찾겠답시고 학자들이 헛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바우돌리노>에서, 바우돌리노 일행은 작품 내내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지어내 위기를 모면합니다. <바우돌리노>는 중세 문화와 전설 중 상당수가 바우돌리노 일행이 지어낸 거짓말을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어서 생겨났다는, 일종의 중세 문화 패러디 같은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에, 바우돌리노와 함께 모험(?)하던 키오트라는 등장인물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모험담으로 써내겠다는 대사를 합니다. 이 키오트는 독일 중세 서사시 <파르치팔>에서 원용한 캐릭터입니다.

 

<파르치팔>은 중세 독일 서사시에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아서 왕 전설에 등장하는 성배의 기사 퍼시벌을 주인공으로, 볼프람 폰 에셴바흐가 쓴 서사시지요. '파르치팔'은 퍼시벌의 독일어식 발음으로, 작품 내에서 아서 왕 일행은 모두 독일어식 이름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거웨인은 가반, 아서 왕은 아르투르, 그외 등등요. 그런데 볼프람은 키요트의 책을 보고, 파르치팔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완역본에서 키요트를 언급하는 대목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전으로는 416페이지, 1-30행에 해당하는 대목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왕의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리다무스였다. 키요트 자신도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키요트는 가인의 이름인데, 그는 순전히 예술 때문에 다른 것은 전혀 할 줄 몰랐던 사람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분들이 그의 작품을 들으면 즐거워질 정도로 오직 그렇게 노래 부르고 작시만 했다. 바로 이 키요트는 프로방스인으로서 파르치팔에 관한 이야기를 이교도의 필사본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그가 프랑스어로 알려준 것을, 내 이성이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계속 독일어로 이야기할 것이다.'

<파르치팔>, 볼프람 폰 에셴바흐, 허창운 역, 한길사, 2005년, p.374

 

볼프람 폰 에셴바흐에 따르면, 이교도/이슬람 문헌에 파르치팔의 이야기가 있었고, 키요트라는 사람이 그걸 찾아 프랑스어로 옮겼고, 볼프람은 그 프랑스어로 기록된 파르치팔의 이야기를 자신이 재창작했다고 합니다. <파르치팔>과 볼프람 폰 에셴바흐를 연구하던 학자들은 키요트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옛 문헌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하지만  키요트라는 이름도, 그 비슷한 이름도 파르지팔과 성배 탐색 전설을 소재로 글을 썼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고, 비슷한 언급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키요트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입니다. 완역본에서도 키요트가 처음 언급되는 위 대목에서 이에 대해 주석이 달려 있는데, '키요트는 서술자가 꾸며낸 출전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왜 가공의 인물이 자기 작품의 원전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한 것일까요?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유명한 설화 등장인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차용하기는 했지만, 세부적인 에피소드는 많이 창작해 넣었습니다. '원전'은 미완결되었는데 결말을 창작해 넣었을 뿐 아니라, '원전'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도 마구 나옵니다. <파르지팔>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원제:페르스발)>를 원전으로 각색한 작품..이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대조해 보면 각색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볼프람 작품의 독창성으로 평가받지만, 중세 기준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잔뜩 집어넣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볼프람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색다른 내용이 자신이 지어낸 게 아니라, 실은 다른 자료에 이미 있던 이야기를 가져온 거라고 둘러대야 했지요. 그래서 키요트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고, 그 글의 내용을 자신이 다시 읊고 있는 것이라는 구절을 여러 번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의 학자들은 키요트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까지, 수많은 문헌을 뒤지고 뒤지고 또 뒤져야 했습니다.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려면, 가공의 작가가 이미 글로 쓴 소재라고 둘러대야 했다니, 오늘날에는 상상도 안 되는 풍토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더 황당한 건, 일단 등장인물의 이름과 전체적인 인물 구도가 대충 들어맞기만 하면, 디테일을 작가 마음대로 바꾸는 건 허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말을 작가 마음대로 바꾸는 건 예삿일이었고, 캐릭터의 묘사나 어조도 수시로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가 쓴 작품들 사이에서는, 등장인물 이름은 같은데 캐릭터성이나 이야기 전개가 뒤죽박죽에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다시 없을 강대한 영웅처럼 묘사된 캐릭터가 다른 작품에서는 시시한 졸병처럼 나오는 사례는 수두룩하고, 같은 이름이 작품에 따라 인격자가 되었다가 천하의 말종이 되는가 하면, 가족관계가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경우도 많습니다. 없던 이름을 새로 지어넣는 건 안 되고, 있던 이름을 등장시킨다면 캐릭터를 뒤바꾸든, 완전 남남을 친족관계로 만들든, 지나가듯 언급된 한두줄짜리 이야기에 살을 엄청 붙여 뻥튀기하든 무방한 것이었어요. 이쯤 되면 그냥 새로 이야기를 짓는 것과 뭐가 그리 다른가 싶지만, 어찌 되었건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을 등장시키는 건 안 되었답니다. 심지어 기사의 모험담을 쓰면서도, 다를 바 없는 내용이어도 샤를마뉴 전설을 소재로 삼으면 아서왕 전설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풍조까지 있었지요. 샤를마뉴 황제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 외에는 샤를마뉴 전설에 나오는 기사 이야기도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는데도, 실존인물이 등장한다는 것만으로 급이 다르다고 여겼던 거예요.

 

 

이런 풍토는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지난 뒤에도 여전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대부분이 전설이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거나 다른 책에 이미 실린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고, 셰익스피어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거의 없는데, 이를 두고 셰익스피어가 독창성이 부족했다는 평이 은근히 많습니다만, 그 시대에는 그게 표준이었습니다. 희극 부문에서는 당대의 풍속을 반영한 작품이 그나마 좀 나왔는데, 진지하고 비극적인 작품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이미 있던 이야기를 소재로 각색한' 작품들만 나왔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캐릭터성을 정반대 수준으로 뒤바꾸거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개작하는 등 별의별 각색을 다 했으면서, 등장인물은 여전히 '원전'에도 나왔던 이름만을 등장시키는 것이 철칙이었습니다. 프랑스 고전극 중 가장 유명한 라신의 <페드르>의 작가 서문에는 이런 풍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페드르>는 그리스 신화의 히폴리토스와 파이드라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비극입니다. 파이드라는 남편 테세우스가 자기 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히폴리토스를 사랑하게 되는데, 히폴리토스는 구애를 거절하고, 파이드라는 자살합니다. 그 뒤 히폴리토스는 의붓어머니에게 흑심을 품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테세우스는 아들을 저주하고, 히폴리토스는 저주 덕에 죽어버리고 맙니다. 테세우스는 뒤늦게 진실을 알고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지요.

 

고대 그리스 신화 원전에서, 히폴리토스는 가족관계도 가족관계지만, 무엇보다 여색에 초연해서 파이드라를 거절한 것이라 묘사됩니다. 이런 측면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뤼토스>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의붓어머니를 유혹했다는 소문에 대해 아버지가 추궁하자, 그게 모함이라는 걸 역설한답시고 "저처럼 고결한 사람이 여자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없잖아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사족으로 붙이자면,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에우리피데스 완역본을 읽다가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꽤 당황했더랬습니다. 결백을 주장하는 논리치고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게 아버지 앞에서 할 말이냐,  넌 네가 어떻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요. 나중에 고대 그리스에서 남녀간의 사랑은 좀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해설을 본 뒤에는, 최소한 문화적 맥락은 이해하게 되었지만요.

 

라신 시대 프랑스에서도, 이런 묘사는 황망하게 보였습니다. 라신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을 원전으로 삼으면서도, 히폴리토스가 다른 여성과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파이드라를 거절했다고 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없는 등장인물을 지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곳은 없는지 옛 문헌을 열심히 뒤졌고, 히폴리토스가 아리키아라는 여인을 사랑했다는 구절이 스치듯이 나오자 기뻐했다는 감상을 남겼습니다. 이로써 히폴리토스가 다른 여인을 사랑해서 파이드라의 구애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써도, 없던 인물을 만드는 것은 안 된다는 '관례'를 어기지는 않게 되었으니까요. 작가 서문에서 이 대목을 보면, 현대 독자 관점에는 "어차피 등장인물 이름만 가져왔지 내용과 결말을 거의 새로 썼으면서, 그냥 이름 하나 지어낸다고 뭐가 그리 대수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십상인데, 라신의 입장에서는 정말 처절한 거였습니다.

 

이런 풍토는 비단 신화나 전설의 등장인물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킨 역사극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극을 만들 때 역사왜곡 논란을 피하려고 가공인물을 만들어넣는 경우가 많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기이한 일인데, 실존인물의 이름을 빌려와 행적과 언행을 작가가 완전히 지어내는 건 창작의 자유였지만, 옛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에 문헌에 없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실제 역사 인물을 치열하게 연구한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장군 둘이 서로 싸우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면, 역사에서 두 장군이 서로 맞붙은 기록을 찾아내, 그 장군의 이름을 등장인물 목록에 넣어 작품을 쓰는 식이었지요.

 

 

이런 풍토는 러시아 문학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중세 수백 년 동안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도, 실존인물이나 실재하던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대략적인 스토리라인만 따라가면 세부적인 내용을 완전히 창작하는 것은 작가의 재량이라고 생각하던 것도, 근대 시대에 접어든 뒤에도 그런 인식이 남아 있었던 것도요. 실존인물을 멋대로 변형하며 왜곡하는 건 무방하면서, 새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꺼렸다는 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황당한 일인데,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이처럼 가공인물을 만드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고, 실존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작가의 창작의 자유라고만 생각했던 시절이었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집필할 당시의 퓨슈킨도 딱히 예외가 아니었던 듯합니다. 아마 그 짧은 희곡이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될지도 몰랐을 거예요.

 

 

푸슈킨은 단순히 모차르트 주변인 중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희곡에서 살리에리에게 독살범 역할을 맡겼습니다. 살리에리에게 독살범 역할을 맡긴 건 둘째치고 모차르트를 사사건건 괴롭혔다는 설정을 넣을 것은, 푸쉬킨이 모차르트의 인간관계와 프로필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모차르트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사사건건 훼방놓는 권력자가 실제로 있었고, 천재를 부당하게 핍박하는 권력자라는 설정에는 그 인물이 훨씬 적합했는데도, 그 인물은 쓰지 않았으니까요.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검소한 성품에 엄격한 원칙을 지키는 대주교였지만, 덕분에 음악가에게 후원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낭비라고 여겨 모차르트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으며, 모차르트가 항의하자 오히려 모차르트에게 사사건건 훼방을 놓기도 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모차르트는 실업자에 불안정한 프리랜서가 되는 걸 감수하고 콜레레도 대주교 휘하의 음악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으며, 덕분에 한동안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대주교에게 미움을 샀다는 것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서도 종교인과는 번번이 사이가 어색했고, 종교 관련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는 거의 끊겼습니다. 하지만 푸슈킨은 콜로레도 대주교 대신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에 대립하는 역을 맡겼습니다. 살리에리로서는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의 웬 작가가, 자기 상상으로 써낸 이야기 덕분에 졸지에 독살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셈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푸슈킨도 아마 자기 처지를 비유하면서, 자신이 만든 구도에 실존인물 이름을 대충 대입해 집어넣은 그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유명해질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요.

 

 

19세기 중후반에, 이 살리에리 독살설은 유럽 지역으로 역수입되어 널리 퍼지며,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아질 정도였습니다. 근거도 없는 독살설이 이렇게 널리 퍼질 수 있다는 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다. 하나는 요절한 천재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열풍이었지요. 살리에리는 이탈리아인이었고, 모차르트는 죽은 뒤에야 합당한 평가와 대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생전의 모차르트는 작품 잘 쓰고 인기 많은 작곡가 중의 한 명이었지 불세출의 음악가라는 평까지는 안 받았습니다만, 세월이 흐른 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모차르트의 작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절한 천재, 그것도 생전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천재에는 안타까운 감상이 들기 쉽지요. 안타까워하며 뒤늦게나마 작품을 아껴주기만 한다면 나름대로 훈훈한 미담이겠습니다만, 문제는 그게 외국인 악역을 만들어, 그 악역을 미워하는 쪽으로 표출되었다는 겁니다. 살리에리를 미워할수록 모차르트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표라도 된다는 것인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처럼 독일어권 출신이었다면, 그 소문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푸슈킨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창작물 하나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뒤엎고, 나아가 '역사적 사실'로 여겨지는 소문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푸슈킨은 절대 그런 걸 의도하지 않았다는 건데, 푸슈킨의 희곡이 살리에리 독살설의 원전이라는 것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판국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