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기사>는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대본을 쓰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하여, 1911년 초연된 오페라 작품입니다. <장미의 기사>라는 제목은 원제인 <Der Rosenkavalier>를 직역한 것으로, 기사라고는 하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장미의 전령'이 더 적합한 번역일 듯 합니다. 칼을 들고 싸우는 기사가 아니라, 기사로 대우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청혼의사를 대신 전달해주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의역하면 '함진아비'가 된다는 말도 있지요. 요즘에는 대부분의 오페라가 그렇듯이, 그냥 원제대로 <로젠카발리어>라고 읽기도 합니다.
'장미의 기사'는 일종의 결혼 전령입니다. 오페라의 묘사에 따르면, 어떤 남자가 청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면, 우선 친척 한 명을 고릅니다. 그 친척이 은빛 옷을 차려입고 은장미를 아가씨에게 건네주면, 그 아가씨가 은장미를 받으면서 청혼이 성립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은장미 장면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신비로울 정도로 황홀한 음악이 인상적이지요. 일명 '은장미 헌정'이라 불리는 이 장면은, 'Mir ist die Ehre widerfahren', 번역하면 '제가 이 영예로운 임무를 맡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약 10분간의 장면입니다.
이 오페라가 워낙 유명한 나머지, 18세기 빈에 은장미를 선물하며 청혼하는 풍습이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장미의 기사> 오페라 대해 설명하면서, 실제로 그런 풍습이 있었다는 설명이 같이 적힌 경우도 있고요. 이 은장미 청혼 장면은 오페라 사상 가장 낭만적인 장면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황홀할 정도로 환상적이면서 낭만적인 장면입니다. 은빛 옷을 입고, 은장미를 선물하면서 청혼한다니, 상상만 해도 더없이 낭만적인 장면일 것만 같은데, 이 장면의 음악은 낭만적이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1960년 잘츠부르크 실황 공연의 장미 헌정 장면으로,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역대 최고의 원수부인으로 불리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가 원수부인 역으로 출연한 영상으로, 카라얀이 지휘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출연진은 옥타비안 역에 세나 유리나치, 조피 역에 안네리제 로텐베르거입니다.
위 장면의 독일어-한글 번역 대역본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번역본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은장미 헌정 청혼은 작가가 만들어낸 풍습입니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가 다스리던 시절의 빈에서 그런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장미의 기사> 이전에 그런 풍습을 언급한 기록 역시 없습니다. 오페라 역사상 낭만적이기로 손꼽히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풍습 하나를 새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페라가 워낙 유명해진 나머지, 혹은 그 풍습이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진 나머지, 정말 그런 청혼풍습이 있었다고 여겨질 정도로요.
이 작품에서 18세기 빈의 역사적 모습과 어긋나는 묘사는, 비단 장미 헌정 청혼만이 아닙니다. 작중에서 우스꽝스러운 조연인 옥스 남작이 왈츠 선율을 흥얼거리기도 하는데, 빈에서 왈츠가 유행했던 것은 19세기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의 음악이 워낙 흥겹고 좋은지라,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게 되지요. 어차피 마리아 테레지가 다스리고 있다고 잠깐 언급되는 것 외에는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아득한 옛날 그 언젠가' 쯤으로만 받아들이면 되는걸요. 다만, 오페라의 묘사를 진짜 역사라고 받아들이는 것만은 지양해야겠지만요.
후고 폰 호프만슈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콤비는, 후일 다른 작품에서도 청혼 풍습을 만들어냅니다. 1933년의 <아라벨라>라는 작품에서였지요. <아라벨라>는 1860년대의 빈 사교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의 남주인공 만드리카는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자신의 고향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면, 여자가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로 맑은 물 한 잔을 떠다 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오페라 말미에, 여주인공 아라벨라는 피곤해서 목이라도 마른 것처럼 하인 벨코에게 물 한 잔을 달라고 한 뒤, 그 물잔을 만드리카에게 건네줍니다. 만드리카 고향의 풍습대로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 장면은 작중에서 순수하고 소박하면서도, 목가적으로 묘사됩니다. 허례허식 같은 것 없이, 이 맑은 물처럼 순수한 마음을 드리겠다는 것처럼요.
199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실황 공연 영상으로, 영어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여주인공 아라벨라 역에 키리 테 카나와, 남주인공 만드리카 역에 볼프강 브렌델입니다.
위 장면의 독일어-한글 번역 대역본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번역본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물잔으로 청혼을 수락한다는 이 풍습 역시, 작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크로아티아 지역에는 그런 풍습이 없었어요. 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별개로, 풍습 자체는 소박하면서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 묘사되어 인상적입니다. <아라벨라>에서는 시종일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빈 사교계의 모습이 꾸준히 묘사되는지라, 물잔 청혼의 소박하면서도 목가적인 순수함이 더욱 두드러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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