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로의 결혼>의 첫 장면은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새신상 피가로와, 새신부 수잔나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피가로는 주인님이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며, 좋은 방까지 내준 것에 감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수잔나는 주인인 알마비바 백작이 자신을 유혹할 궁리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의 대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수잔나는 백작이 '영주의 권리'를 내세워 자신을 취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피가로는 주인에게 맞설 생각을 하게 되지요. <피가로의 결혼>의 첫 아리아인 '나리께서 춤추기를 원하신다면 Se voul ballare'은 이 상황에서 피가로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춤추기를 원하신다면, 장단이라도 맞춰드립지요! 당신의 음모에 당하지만은 않을 겁니다!'라는 노래입니다.
어윈 슈로트가 '나리께서 춤추기를 원하신다면'을 부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나리께서 춤추기를 원하신다면'의 이탈리아어-한글 가사 대본입니다. 출처는 http://foneclassic.tistory.com/92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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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오는 '영주의 권리'란 이른바 초야권을 말합니다. 초야권이란 영주가 자신 휘하의 농노나 하녀가 결혼할 때, 첫날밤을 취할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어둡고 암울한 중세의 이미지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입니다. 심지어 농노나 하녀의 첫 아이는 영주의 아이일 수도 있으니, 나름대로 특별하게 대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하녀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려는 백작 주인에게 맞서, 하인 피가로가 온갖 기지를 발휘해 백작에게 역공하는 이야기입니다. 오페라 말미에 백작은 피가로의 계략에 빠져 자신의 아내를 하녀 수잔나로 알고 추파를 던지다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지요. 그러자 백작은 백작부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모두들 해피엔딩의 합창을 부르며 오페라는 끝납니다.
그런데, '초야권'이란 실제 역사에서 존재했던 이야기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초야권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근대 이후에 근대 이후를 '중세의 악습을 몰아낸 빛나는 시기'로 찬양하면서 처음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컨대, 초야권같은 악습을 없앤 지금 시대는 얼마나 발전되었느냐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막상 중세 문서 중에는 초야권이 언급된 사례가 전무합니다. 초야권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문헌이 있기는 있는데, 그 내용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럴 권한이 있기는 있겠지만, 자비롭게 포기하고 행사하지 않겠노라."라는 것이고, 그나마도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두 점이 전부입니다. 중세 시대는 암흑시대라는 이미지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뒤집어쓴 부분이 많은데, 초야권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겁니다. 다른 건 그나마 과장한 정도인데, 이 쪽은 아예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네요.
어쩌다 초야권같은 터무니없는 개념을 만들어낸 걸까요?
초야권 이야기의 시초는, 결혼세를 풍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공식적인 인증을 받은 결혼식만이 인정되고, 인정받지 않은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는 법적으로 남남이 됩니다. 동양의 적서차별은 서양의 적서차별에 비하면 엄청나게 너그러운 겁니다. 적서차별이 심했다는 조선시대에도 반쪽이나마 일단 핏줄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었지만, 서양에서는 정실부인 소생이 아니면 법적으로는 남남이 되어버리죠.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재산 상속권도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공인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심지어 국왕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로 유명한 요크 왕가의 리처드 3세는 조카의 왕위를 무단으로 빼앗은 찬탈자 취급을 받을 때가 많은데, 공식적으로는 신하들이 법적으로 합당한 명분에 의해 추대한 것이었습니다. 전왕 에드워드 4세의 왕비이자 리처드 3세의 형수인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는 신하들에게 인망이 없었는데, 신하들은 어린 왕이 즉위하면 모후인 왕비가 전횡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는 국왕과 정식결혼을 아닌 비밀결혼을 했으니, 자녀에게 왕위계승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지요.
에드워드 4세는 외국 왕실과 정략결혼 협상이 오가던 시점에서, 연애결혼을 한답시고 국내 귀족 출신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결혼을 했고, 나중에 일방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정식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법적으로는 지극히 합당한 이야기였고, 에드워드 4세의 아이들 다음의 서열이었던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 3세가 새 국왕으로 추대됩니다. 훗날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는 튜더 가의 헨리 튜더와 손잡고 리처드 3세를 패퇴시켜,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지요. 원래라면 왕이 되었을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의 아이들은 헨리 7세가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는군요.
유럽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결혼이란 국왕에게도 예외가 아닐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결혼을 공증한다는 명목으로 '결혼세'라는 것이 생깁니다. 세금을 내야 결혼을 인정받고, 태어나는 아이들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 결혼세를 풍자하기 위해, 관리가 신방을 점거하고 있다가, 결혼 세금을 받고 나서야 신방을 비워준다고 풍자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풍자는 갈수록 살이 붙어, 어느새 '새신부의 첫날밤'을 결혼의 세금으로 요구했다는 이야기로 발전하게 되지요. 이것이 초야권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초야권을 만들어낸 작품도 아니고, 중세를 폄하하려고 작정한 작품도 아닙니다. 아마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 중, 작품 소재로 쓸만할 것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왔을 뿐이겠지요. 당시 사람들은 옛날에는 초야권이라는 게 있었다고, 진정으로 믿기도 했고요.
하지만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초야권을 언급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고, 이 작품을 통해 옛날에는 초야권이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접한 사람도 많을 정도입니다. 초야권 이야기가 아직도 널리 퍼져 있는 데에는, <피가로의 결혼>의 인기도 한몫했을 거예요. <피가로의 결혼>으로 초야권에 대해 처음 들었다는 경험담은, 좋은 작품에 쓰인 모티브가 얼마나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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