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다루는 책에서 빠지지 않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루이 16세가 루이 15세의 맏손자이자 후계자이던 시절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시집왔을 때, 루이 15세의 애인이던 뒤바리 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와 결혼하지는 않았고 왕비도 아니었지만, 루이 15세의 애인으로 궁정의 실세였습니다. 하지만 루이 15세의 딸이자 공주들은 뒤바리 부인을 싫어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세손비에게 뒤바리 부인을 싫어하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식 행사에서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한 마디도 걸지 않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기에, 더욱 무게감 있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이 일은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측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할 정도의 일로 비화합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딱 한 번,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게 되지요. "오늘 베르사유에는 사람이 많군요."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의 애첩이라고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국왕의 애인이 국왕의 아이를 낳으면, 태어난 아이를 국왕의 서자라고 쓰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라면 저 상황에서 애인 노릇을 하는 여자는 애첩으로 불렸을 것이고, 태어난 아이는 서자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사회와 단어의 사전적 의미 등을 엄격하게 따지면, 유럽에서 국왕의 애인 노릇을 하는 여자는 애첩이 아니라 정부라고 해야 하고, 정부가 낳은 아이는 서자가 아니라 사생아라고 써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유럽에서는 동양식 의미의 첩이 없었고, 서자라는 개념 역시 없었기 때문입니다.
첩은 본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남자에게 속한 여인 정도의 대우는 받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본처가 낳은 적자와 달리 엄연한 서자지만, 서자여도 일단 법적으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적자에게는 밀리지만 서자가 나름대로 후계자 자격을 인정받기도 했고, 후계자 자격이 없을 때에도 법적인 아들 대우는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서러운 서자 입장이어도, 홍길동이 아버지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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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홍길동전>과 적서 차별 제도, 사회 문제를 소재로 삼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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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럽에서는 첩 제도가 없었고, 서자 제도도 자연히 없었습니다. 애첩이란 한국에서는 아내 이외의 애인을 뜻하는 의미쯤으로 통용되지만, 사전적인 의미를 엄격히 따지면 총애하는 첩 정도의 의미입니다. 애첩이 낳은 아이를 서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 그래서 유럽 국왕의 애인을 애첩이라고 부르고, 애인이 낳은 아이를 국왕의 서자라고 하면, 후궁 및 후궁이 낳은 서자처럼 부르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대신 유럽에서는 국왕과 결혼하지 않았으면서, 애인 노릇하는 여인을 정부라고 부릅니다. 애첩도 아니고, 후궁은 더더욱 아닙니다. 유럽 역사에서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많이 다르지만, 정부가 실권을 가지고 높은 위상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집갔던 시기, 절대왕정 프랑스에서는 특히 심했지요. 뒤바리 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단 한 번이나마 나름대로 양보받고 인사받는 데 성공했던 일화는 아주 유명하며, 그 외에도 프랑스에서는 국왕의 정부가 장군이나 장관 등을 임명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공개적인 권력을 인정받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아이를 낳으면 서자조차 되지 못했고, 어디까지나 사생아였습니다. 제한적이나마 아버지의 아들 대우는 받는 서자와 달리, 사생아는 아버지와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이었고, 아무런 권리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국왕이 총애하고 싶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기반 없던 여인을 단번에 정부로 들여서 부와 권력을 안겨다줄 수도 있었지만, 국왕의 변덕만으로 금세 흥할 수 있었듯이 국왕의 변덕만으로 금세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동양의 후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자리이고, 동양의 애첩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동양의 애첩은 아이라도 낳으면, 아이가 일단 서자로서 부분적이나마 인정받고, 애첩은 서자의 어머니 자리라도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동양의 후궁과 서양의 정부는, 왕비 이외의 국왕의 다른 여인이라는 점 외에는 아주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한 가지 질문을 던져주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애첩은 말할 것도 없고, 후궁이면 정식 신분이 있고, 많은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 재혼하지 못하고 이혼하지도 못하고 궁에서만 있어야 하는 등, 정식 지위와 권리에 따른 의무와 제약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 서양의 정부는 대척점처럼, 국왕의 변덕과 총애로 얻어낸 것 외에는 정식으로 보장받는 신분이나 권리가 없지만, 의무나 제약도 없습니다. 정부 노릇을 그만두고 궁에서 나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고, 자기 발로 나가건 쫓겨나건 일단 정부 노릇을 그만두면 후궁과 달리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정부 관련 일화에서는 별볼일 없는 집안 출신의 여성이 국왕의 총애를 얻고 정부 노릇을 좀 한 뒤, 정부가 되기 이전보다 훨씬 조건이 좋은 귀족 남자와 결혼한 정부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부와 후궁 중 어느 쪽이 여자 입장에서 그나마 더 나은 제도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의미 없을 것 같습니다. 장단점이 뚜렷하고, 극단적인 일화까지 이야기한다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의무와 권리라는 테마에서는 꽤 흥미로운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권리와 의무가 함께한다면, 권리가 있는 대신 의무가 있는 것과, 권리가 없는 대신 의무도 없는 것, 그 두 상황이 비교되는 구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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