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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 왕비와 여왕 사이에서

아리에시아 2023. 12. 2. 21:35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헬레네는 신화에서부터 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되었으며,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헬레네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묘사에 따르면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왕비였으며,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와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헬레네가 스파르타의 왕비 자리를 포기하고,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를 따라서 트로이에 가면서, 메넬라오스 및 메넬라오스와 동맹 관계라도 할 수 있을 여러 그리스 국가들이 트로이를 공격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이 저렇게 묘사된 것을 보고, 이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꽤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왕비인데, 국왕이라면 그냥 다른 여자를 새 왕비로 들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 신화에서는 그만큼 헬레네가 압도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인 것처럼 나오지만, 그래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것은 여전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훨씬 뒤에 헬레네의 가계도를 보고서야 비로소 저 부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헬레네는 제우스가 백조로 변해서 접근한 여인으로 유명한 레다의 딸이며, 아버지가 스파르타 왕입니다. 그리고 레다 신화에서 레다가 낳은 아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헬레네는 왕자가 없는 스파르타에서 공주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공주로서 다음 왕위를 이었고,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 공주의 남편으로서 스파르타의 국왕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왜 국왕이 왕비가 도망쳤다는 이유로 왕비를 쫓아서 전쟁까지 벌였는지, 그리고 그 전쟁이 왜 여러 동맹국이 참전할 정도로 지지받았는지, 단순히 왕비가 예뻤다는 것보다 훨씬 명쾌한 설명이 나오게 됩니다.

헬레네가 당시 스파르타 왕실의 후계자였기에, 헬레네와 결혼해야만 스파르타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왕과 왕비가 모두 queen인 영어를 비롯해서, 여왕과 왕비가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언어가 여럿 있지만 한국어로는 구별되기에 생긴 해프닝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헬레네는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걸까요?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당연히 여왕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럽 역사에서는 근대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마 전 블로그에서 살리카법에 대해 소개하면서, 딸이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살리카법에서는 사위를 후계자로 삼는 일종의 편법 같은 계승 방법도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https://ariesia.tistory.com/324

 

살리카법에 대해서

살리카법은 흔히 동양식 남계 상속처럼, 남자 후손만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법처럼 여겨지고는 합니다. 이른바 왕위계승의 살리카법은 대개 그런 의미로만 통용되었기에, 결과적으로는

ariesia.tistory.com

 

그리고 국왕이나 영주가 군사를 직접 이끄는 것이 중요한 시절, 여성이 후계자가 될 수 없을 때에는 왕자가 없을 때 공주의 남편이 다음 후계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공주와 부마가 공동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실권은 남편 쪽이 가지는 경우가 많았고, 아예 공주는 왕비가 되고 그 남편이 국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자는 18세기 초 스웨덴 왕위계승자가 되었던 울리카 엘레오노라 공주에게도 보이는 사례로, 불과 300여년 전 유럽에도 사례가 있었습니다.

 

헬레네를 한국어 어법에 맞게 여왕인지 왕비인지 구별한다면, 공동왕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왕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화에서는 남편 메넬라오스가 헬레네와 결혼한 동안, 일개 국서가 아니라 엄연한 국왕으로 묘사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