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바그너의 오페라와 나치 정권

아리에시아 2014. 3. 8. 11:47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니벨룽의 반지>, <방랑하는 네덜란드 인>, <파르지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작품을 남긴 독일 작곡가입니다. 독일어 오페라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진 작곡가를 꼽으라면, 바그너가 1, 2위를 다툴 겁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보다는 작품의 인지도나 후대의 영향력에서 못 미치는 편이고, 모차르트는 <마술 피리>, <후궁 탈출> 등의 징슈필 몇 편을 제외하면 정식 오페라 작품은 모두 이탈리아어로 작곡했거든요.

 

바그너가 작곡한 음악 중 가장 유명할, 결혼 행진곡입니다. 원래는 오페라 <로엔그린> 3막의 시작 부분의 음악으로 작곡된 선율로,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합창 장면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위 장면의 독일어-한국어 대역 대본입니다. 대본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바그너는 독일어 오페라뿐만 아니라 오페라 역사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족적을 남긴 작곡가이며, <로엔그린>의 결혼행진곡이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의 '발퀴레의 기행' 등은, 오페라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곡입니다.

 

하지만 바그너는 '나치 작곡가'라는 식의 오명으로도 유명하지요. 나치와 결탁하고, 반유대주의를 작품에서 집어넣은 예술가라고요. 바그너가 어떤 작품을 작곡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치 작곡가라는 식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는 경우도 상당할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도 기피하는 수준이지요.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오페라가 전막 연주된 적 없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주요 대목이 연주된 적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때마다 이스라엘에서는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지요.

 

나치 정권이나 히틀러와 바그너의 작품을 같이 엮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치 정권을 다룰 때, 웅장한 배경음악을 넣는 장면에서, 바그너가 작곡한 음악을 집어넣는 경우도 많고요. 바그너의 작품이 나치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나치의 음악정책을 보면 그런 인식이 생길 만도 해요. 공식행사 등지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자주 연주한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바그너의 작품만을 상연하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계속 개최할 정도로, 지원도 많이 했지요.

 

나치 정권의 고위인사들은 막상 바그너의 작품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나치 정권의 수장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바그너를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에, 나치 행사 등에서 자주 연주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는 돈이 없던 청년 시절 평균 네 시간 연주되는 바그너의 작품을 입석으로 사서라도 볼 정도로, 열렬한 바그너 팬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 없나요? 바그너가 죽은 것은 1883년, 히틀러가 태어난 것은 1889년입니다. 바그너는 히틀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바그너가 나치 정권 하에서 호의호식하고, 히틀러와 결탁하여 반유대주의를 퍼뜨렸다는 식의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지요.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극심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친 것을, 바그너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합니다. 예술작품으로 반유대주의를 미화하고 정당화했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식으로요. 이런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다가, 연도를 따져보면 황당합니다. 당사자가 죽은 뒤에 태어난 사람이 자기 작품을 악용했다고, 애꿎은 당사자가 도매금으로 넘어간 셈이거든요. 살아 있을 때 특혜를 받은 뒤에, 나중에 뒷말 듣는 거면 억울하지나 않지....

 

 

히틀러는 웅장한 음악을 통해 장엄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선호했고, 바그너의 대형 오케스트라 작품은 이런 곳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습니다. 나치 정권은 독일 음악의 역사적 우수성을 설파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미화하기 위해, 독일 작곡가의 작품을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공연을 지원했습니다. 영국에 귀화한 독일인이자, 본인도 영국인이라고 생각한 헨델을 독일 태생이라는 이유로 독일의 자랑스러운 작곡가라고 떠받들 정도였지요. 하지만 막상 훨씬 더 유명한 모차르트의 작품은 푸대접했는데,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대형 행사장에서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거든요. 모차르트가 민족주의보다는 세계 음악의 장점과 특징을 고루 흡수한 코스모폴리탄에 훨씬 더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는 것도, 민족주의 나치 정권에게는 마이너스 요소였고요.

 

 

바그너의 작품이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나치를 예고한다는 식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견강부회가 따로 없지요. 자기 죽은 뒤에 태어난 사람이 자기 작품을 악용한 걸, 왜 훨씬 이전에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나요. 게다가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제국을 열 시절에 활동하던 작곡가였으니,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도 유난한 일은 아닙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수백 년간 흩어져 있던 독일이 하나로 통일되기를 열망하고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바그너는 억울한 오해를 많이 뒤집어썼습니다. 바그너가 확고한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이미지가 대표적이지요.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근거로 언급되는 건 많은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대부분입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발언이라는 것을 뜯어보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중에 유대인이 있으면, "난 그 사람이 싫은데, 다른 사람들이 유대인 혈통이라고 뒷말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더 싫어지네." 라는 식이었지요. 막상 친한 사람 중에 유대인이 있으면, 유대인이라고 거리끼기는커녕 잘만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는데, 바그너 정도의 행보면 생각없이 유행을 좀 따라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 같은 걸 퍼뜨리지 않은 것만도 어디인가요.

 

히틀러가 좋아한 예술가는 바그너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현직 음악가를 대놓고 총애해서 특혜를 주기도 했고, 바그너 외에도 브루크너 등 여러 음악가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헨델 등 독일계 음악가들의 작품을 두고, 게르만 정신의 현현 운운하면서 대놓고 민족주의적 용도로 써먹기도 했지요. 그리고 미술에서도 고전적 화풍을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진주귀걸이 소녀'로 유명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을 모으는 데 광적으로 집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좋아한 그 수많은 예술가 중, 히틀러와 같은 부류로 묶인 예술가는 오직 바그너뿐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은 뒤에 태어난 권력자가 자기 작품을 좋아했다는 이유로, 바그너는 졸지에 전범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을 좋아하면 나치 이념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요지의 도식화도 드물지 않지요. 막상 바그너는 히틀러를 본 적도, 히틀러의 후원을 직접 받은 적도 없는데 말이예요. 바그너의 유족들이 나치 정권과 좀 가까운 사이기는 했지만, 며느리인 비니프리트 바그너를 제외하면 "우리 집안의 예술가를 존경하고 관련 행사를 전폭적으로 후원해주는 정권에 대한 호감"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비니프리트 바그너는 꽤 열렬한 나치 추종자였습니다만, 아들도 아니고 며느리의 행적을 훨씬 전에 죽은 바그너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요. 아들 문제라면 가정교육 이야기라도 하겠지만, 며느리 문제라면 그럴 수도 없는 걸요. 왜 아들에게 여자 보는 눈을 가르치지 않았냐고 그 아버지에게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좋지 않은 곳에 악용되는 바람에, 애초에는 별 관계 없던 것도 덩달아 호감도가 떨어지는 일은 빈번합니다.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악용되었을 뿐 무관한 쪽에게 책임을 묻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히틀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바그너의 작품이 나치 예술의 대표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오페라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 오페라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