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는 작가의 사고관이나 사상 등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낙관론이 비현실적이고 비관론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낙관론자보다 비관론자가 더욱 유능하거나 긍정적으로 묘사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등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작품 내용에 반영되는 경우는 워낙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이렇기에 역으로 작품을 분석해서, 그 작가의 사고관을 연구할 수도 있지요. 만약 어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유난히 특정 나라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면, 작가 개인이 그 나라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작품 중에서는, 작가가 딱히 의도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의도와 반대인데도, 소비자의 반응을 의식해서 집어넣은 특정 설정이나 묘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 개인이 연회 같은 행사를 싫어한다고 해도, 당시 연회 이야기가 한참 유행해서 연회 장면을 넣기만 하면 작품의 인기가 올라가는 풍조가 있었다면, 연회를 싫어하는 작가가 자기 작품에 연회 장면을 집어넣을 수도 있는 것처럼요. 그리고 이런 경향은, 대중성이 강한 예술 분야일수록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서는, 작품을 분석해서 작가 개인의 사고방식과 신념을 추측하기가 애매해지지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는 사례를 하나만 꼽으라면, 개인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꼽을 겁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연극 관람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쓰여진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인기 있을 만한 요소를 작정하고 많이 넣는가 하면, 연극 대본이라서 연극 형식에 철저하게 맞춰져 있기에 극적 흐름에는 좀 뜬금없는 장면전환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소재나 작품 분위기도, 대중적 인기에 많이 좌우되었습니다.
일례로 셰익스피어 초기작 중에는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여러 사람들이 갖가지 계략에 잔혹하게 죽어나가는 살육극을 다루었습니다.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는 기록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작품 중 최초로 대중적 인기를 끈 작품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읽어보면 다섯 살짜리도 알아차릴 수 있을 법한 얄팍한 속임수에 사람들이 줄줄이 속아넘어가는 전개만 이어지기에, 너무 황당무계해서 실소가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묘사는 자세하고 폭력 강도도 높아서, 괜히 뒤숭숭해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막상 발표 당시에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이 작품이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는 이후로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을 쓰지 않았습니다. 무턱대고 잔인하기만 할 뿐 허술하기 그지없는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작가에게는 첫번째 성공작인데 이후에는 비슷한 유형의 작품은 절대 쓰지 않았다는 것도 희한해 보입니다. 하지만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가 초연되었던 1590년대 초반 연극계에서는 잔혹한 살육극 이야기가 유행했으며, 그 직후 살육극 유행이 끝났다는 외부적 상황을 상기하면 이 의문은 곧바로 풀립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활동 초창기에는 살육극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지만, 작품 하나를 쓴 후에는 관심이 시들해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냥 인기 있던 소재를 차용해서 작품을 쓰고, 그 소재의 인기가 시들해지니 다시는 그 소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훨씬 그럴듯해 보이지요.
셰익스피어는 영국 역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도 여럿 썼는데, 셰익스피어 역사극에 묘사된 역사적 묘사 등은 역사성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습니다. 작정하고 역사왜곡을 한 수준의 묘사도 많지요. <헨리 6세>에서는 잔 다르크가 희대의 요부이자 마녀처럼 묘사되는가 하면, <리처드 3세>에서는 1483-1485년 동안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리처드 3세를 중상모략 수준으로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묘사합니다. http://blog.daum.net/ariesia/78 하지만 이걸 두고 셰익스피어가 역사왜곡을 감행했다고 평하는 것은 무리수이며, 셰익스피어 개인이 잔 다르크나 리처드 3세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식으로 논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말일 겁니다.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잔 다르크와 리처드 3세가 실제로 악독한 이미지로 통용되었으니까요. 잉글랜드 입장에서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가 거의 이긴 것처럼 보였던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으니 좋게 보일 리 만무하며, 리처드 3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할아버지였던 헨리 7세의 정적이었습니다. 게다가 헨리 7세는 원래라면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도 없을 정도의 입장이었는데, 오로지 리처드 3세를 죽였다는 것 때문에 잉글랜드 왕좌를 차지한 인물이라, 헨리 7세의 정당성이 취약한 만큼 리처드 3세를 더더욱 극악무도하게 묘사해야 했을 겁니다. 1차적으로는 셰익스피어가 알고 있던 상식과 인물평이 그런 것이었으며, 2차적으로는 당시 청중들이 가졌을 이미지에 맞춰서 묘사해야 했겠지요.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이라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극적으로는 좀 어색하거나 뜬금없거나 김빠지는 장면 중 상당수에 영향을 미쳤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극에서는 전투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만, 스펙터클한 전쟁 장면 등은 직접 묘사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등장인물의 대사로 언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투하겠다고 선포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 누가 나와서 지난 전투에서 졌다거나 이겼다는 대사를 하는 식입니다. 셰익스피어 본인이 스펙터클하고 스케일 큰 장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피그말리온>이라는 희곡이 있는데, 이 희곡을 쓴 조지 버나드 쇼가 작중에서 여주인공 일라이저가 무도회에서 아리따운 숙녀처럼 칭송받는 대목을 연극 공연할 때에는 삭제해도 무방하다고 직접 지정했던 사례처럼요.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연극 무대에서 전쟁영화같은 스펙터클한 물량공세 장면은 제작비 문제, 무대 면적 문제 등으로 현실성이 없었다는 쪽이 실제 이유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당시 연극 무대 담당은 셰익스피어 본인이 물량공세 장면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지, 혹은 쓰고 싶어하는지에도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요. 예산 및 물리적 이유에서 연극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장면, 공연할 수 없는 장면이라는 식으로만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셰익스피어 연극에 묘사된 여성상도, 당시 연극 풍토와 무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극에서는 여성 캐릭터가 꽤 많이 등장합니다만, 대부분은 젊은 여성 캐릭터이고, 나이 든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가 남장하는 장면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등, 작품 개별적으로는 주연급 여성 캐릭터가 굳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 작품에서 너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연극 공연 풍토를 감안하면, 이런 묘사가 곧바로 이해가 됩니다. 셰익스피어 시절에는 여성 역도 변성기 이전의 청소년 남성 배우가 여장해서 맡았습니다. 이렇다보니, 청소년 남성이 공연하기 힘들 노인 여성 역은 자연히 비중이 줄어들고, 원래 남성 배우가 맡는 것이니 여성 캐릭터가 남장했다는 명목으로 남자 행세를 하는 장면을 비중 높게 묘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개인이 나이 많은 여성 캐릭터는 묘사하기 싫어하고, 여성이 남장하는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을 가능성도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공연 풍토에서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어차피 별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이걸 주제로 셰익스피어의 여성관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도 있겠지만, 딱히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문제입니다만, 비단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가가 대놓고 대중적 인기를 의식하고 유행하는 소재를 집어넣은 작품에서, 작가의 사고관은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런 작품에서, 작가 개인의 사고관을 역으로 추론하는 것은 실제에 얼마나 가까운 걸까요? 너무나도 불확실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절대적인 정답은 없을 거라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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