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유랑극단 단원들이 이끌어나가는 오페라입니다. <팔리아치>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랑극단의 주역을 맡는 카니오와 네다는 일단은 부부입니다만, 둘의 사이는 영 어색합니다. 카니오는 다른 남자 단원과 네다가 같이 있는 모습만 봐도 화를 내는 수준이고, 네다는 그 질투심에 몸서리치는 수준이 되어버립니다. 한편 네다에게 반한 실비오라는 청년은 네다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말하고, 네다는 그 제의를 받아들여 공연이 끝나는 즉시 둘이 같이 도망치기로 합니다. 하지만 카니오는 네다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으면서, 같이 도망가자고 말한 것을 들어버렸죠. 하지만 그 남자 쪽이 누구인지는 알아차리지는 못합니다. 평소에 사이가 어쨌건, 카니오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도망가자고 계획하는 상황을 목격해버린 처지가 되었는데, 그래도 왁자지껄 요란하게 웃는 희극 공연은 예정대로 해야 합니다. 유명한 '의상을 입어라'라는 아리아가 이 장면에서 나오는 아리아입니다. 지금 마음이 어떻건 간에, 의상을 입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광대 역할을 수행하러 가야 한다고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 공연하는 희극의 내용이, 그 날 벌어진 상황과 거의 흡사한 줄거리였습니다. 인명은 일단 오페라 내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식 인명을 사용해겠습니다. 광대 팔리아초와 콜롬비나가 커플인데, 콜롬비나는 다른 광대인 알레키노를 불러와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팔리아초 역을 카니오가 맡고, 네다가 콜롬비나 역을 맡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팔리아초는 콜롬비나에게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 누구냐고 추궁하죠. 그런데 이 장면에서 카니오는 그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해 버리고, 불같이 화를 내는데, 관객들은 그냥 연기를 잘 한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팔리아초 역을 맡은 카니오는 도대체 누구와 같이 있었냐고 불같이 추궁하고, 콜롬비나 역을 맡은 네다는 대본대로 알레키노와 같이 있었다는 대사를 하지요. 그런데 카니오는 다음 대사를 하기는커녕, 진짜 같이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라고 분노하더니, 급기야 네다를 찌르고야 맙니다. 네다는 실비오의 이름을 외치며 구해달라는 말을 하고, 실비오가 네다를 구하러 뛰어나오자, 네다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 실비오라는 걸 알게 된 카니오는 실비오까지 찌릅니다. 모두가 황망한 가운데, 희극/공연이 끝났다는 대사로 오페라는 마무리됩니다. 맨 마지막 대사를 저렇게 설명한 것은, 원어 표현을 직역하면 '코미디는 끝났다' 정도가 되는데, 여기서 '코미디'가 좁게는 희극만을 뜻하고, 넓게는 비극과 희극을 아우르는 공연 전체를 뜻하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85년 프랑코 제피렐리가 지휘하고, 플라시도 도밍고가 부른 '의상을 입어라' 동영상입니다. 공연 실황이 아닌 영화 형식의 오페라로, 주연 성악가의 영상을 따로 찍어서 노래와 합성한 형식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팔리아치>에서 소재로 삼은 유랑극단은, 근대 유럽에서 실존했던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모델입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로코코 시기에 특히 흥성했던 장르로서, 로코코 시대가 지나간 19세기에도 변변한 문화공간이 없는 지역에서는 인기를 모았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요상한 옷을 입은 등장인물들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희극 공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리아치>의 극중극에 등장하는 콜롬비나, 알레키노 등도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수백년간 전통적으로 등장하던 캐릭터의 이름이지요.
로로코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인 장 안투안 바토가 1718년경 그린 <피에로>입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을 그린 작품입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그린 작품 중 가장 유명하며, 로코코 회화의 대표작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눈에 봐도 치수가 맞지 않아 헐렁한 옷을 입은 모습만으로도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줄 지경인데,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의상 중 그나마 덜 웃기게 생긴 옷에 속합니다.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묘사된 것처럼,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따로 전용 공연장을 두어 그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을 돌안디니면서 가설 무대를 만들어 그 무대 위에서 공연했습니다. 말하자면 유랑극단이었던 셈이지요. 독특한 것은 유랑극단인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수백 년동안의 역사를 지니는 동안, 이미 정립된 플롯과 캐릭터를 꾸준히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유럽 민담처럼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서 소재를 취한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캐릭터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거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는데도요. 말하자면 창작 캐릭터극이 유럽 여러 지역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진 것이지요.
연극 공연에 대한 오늘날의 고정관념이나 통념과는 다르게,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는 각본보다 이 캐릭터들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당시에는 오페라, 극장 연극 공연 등에서도 공연자가 오늘날의 애드리브처럼 즉흥적인 기교나 대사 등을 집어넣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극장에서 특정 부분을 즉흥적으로 수정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그런 경우보다도 훨씬 유동적이었습니다. 연극 대본은 없다시피 했고, 이미 정립된 캐릭터의 성격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그때그때 대사와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설무대에서 공연하는 유랑극단이라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특징은 한계가 되어버립니다. 서커스 등의 순회공연예술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영화관이 곳곳에 세워지면서 그 인기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TV가 보급된 시대에는 거의 사라져버렸지요. 하지만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만들어낸 특색 있는 캐릭터들은 오늘날에도 문화적 표상으로 면면히 남아있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가 만들어낸 캐릭터 중에는 피에로, 할리퀸, 스카라무슈, 판타로네, 펀치, 콜롬비나 등이 있는데, 피에로는 오늘날 광대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는 이름이며, 판타로네가 입는 의상은 판탈롱 바지의 시초가 되기도 했으며, 할리퀸 의상은 광대 이미지의 표상처럼 여겨질만큼 유명해졌지요. 당시 많은 희극작품에서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캐릭터의 이름과 성격을 그대로 가져온 인물이 종종 등장했으며, 이후로도 코메디아 델라르테 캐릭터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는 희극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극중극에서 이탈리아어로 '알레키노'라 불리는 등장인물은, 우리에게는 영어식 발음인 할리퀸으로 훨씬 더 유명한 그 광대입니다. 콜롬비나, 알레키노 등은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단골로 나오는 이름이지요. 특히 경박한 여자인 콜롬비나가 일단 커플인 남자가 있는 상황에서, 알레키노와 놀아나다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플롯 중의 하나입니다. 할리퀸은 저 사진처럼 총천연색의 마름모무늬 옷을 입는 캐릭터인데, 근대 유럽 광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저 의상이 손꼽힐만큼 유명한 캐릭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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