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는 한바탕 유쾌한 소동이 벌어지는 오페라입니다.
남주인공 에르네스토는 부자에다 구두쇠로 유명한 돈 파스콸레의 조카입니다. 에르네스토는 노리나라는 아가씨와 서로 사랑하지만, 돈 파스콸레는 노리나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노리나는 가난해서 결혼해봤자 득 될 것 없다며, 자신이 정한 부유한 신붓감과 결혼하라고 들이밉니다. 그러자 노리나와 에르네스토는 돈 파스콸레가 둘의 결혼을 허락하도록 한바탕 계획을 꾸미며, 에르네스토의 친구로 돈 파스콸레의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말라테스타 박사까지 끌어들입니다.
돈 파스콸레가 에르네스토를 응징한답시고 찾아낸 방법이란, 자신이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유산은 그 아이에게 갈 테고, 조카는 한 푼도 못 받게 된다는 계획이었지요. 그러자 말라테스타는 자신에게 수녀원에 있는 얌전한 여동생이 있다면서, 소프로니아라는 아가씨를 데려옵니다. '소프로니아'는 굉장히 조신하고 수줍은 아가씨였고, 돈 파스콸레를 보자마자 반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돈 파스콸레는 그 자리에서 결혼에 동의하고, 말라테스타 박사는 결혼 서약을 하는 흉내까지 내지요.
하지만 '소프로니아'는 사실 노리나였습니다. 그리고 노리나는 돈 파스콸레의 아내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남자 돈 안 쓰고 남자 말 잘 듣는 여자를 원하던 돈 파스콸레가 싫어할 행동만 골라 합니다. 한참 그러다가, 어느 날 '소프로니아'는 돈 파스콸레의 조카인 에르네스토와 밀회를 약속했다는 편지를 슬쩍 흘리지요. 돈 파스콸레는 주치의 말라테스타와 함께 그 현장을 습격하기로 하고, 그걸 빌미로 '소프로니아'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편지에 쓰여 있던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정말로 에르네스토와 '소프로니아'가 나타나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는 모습을 목격하지요. 돈 파스콸레가 그 자리에 나타나지만, 에르네스토는 잽싸게 몸을 피했고, '소프로니아'는 오히려 큰소리를 땅땅 칩니다. 그리고 '소프로니아'가 말하길, 자신은 에르네스토의 연인인 노리나라는 여자를 싫어하며, 그 여자가 에르네스토와 결혼해 돈 파스콸레의 집에 들어온다면 당장 그 집에서 나가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죠.
돈 파스콸레는 '소프로니아'를 쫓아내기 위해, 에르네스토와 노리나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온 즉시, '소프로니아'는 자신이 노리나라는 것을 밝히고, 어영부영 주인공 커플이 결혼을 허락받으면서 해피엔딩이 됩니다.
2011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돈 파스콸레> 공연에서, 3막의 2중창입니다. 이 2중창을 보고 돈 파스콸레는 '소프로니아'를 쫓아내겠다며 윽박지르고, '소프로니아'가 에르네스토와 노리나가 결혼하면 이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하자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고 말하지요. 여주인공 노리나/소프로니아 역에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남주인공 에르네스토 역에 테너 매튜 폴렌자니입니다.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위 동영상의 이중창의 이탈리아어-한국어 대역 가사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돈 파스콸레가 '소프로니아'를 소개받을 때, 돈 파스콸레의 주치의인 말라테스타 박사는 소프로니아가 수녀원에서 지내다 온 아가씨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돈 파스콸레는 수녀원에서 온 아가씨라는 말에, 자신이 원하던 조건이라면서 흡족해하지요. 잠깐만요, 수녀원에 있다가 왔다고요? 그럼 수녀거나 수녀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요? 종교에 귀의한 아가씨를 함부로 데려와 결혼해도 되는 걸까요? 수녀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걸요. 게다가 수녀원에 있다 왔다는 게 좋은 신붓감의 조건이라는 식의 표현은 또 무슨 의미인 거죠? 신학교에 다니는 남성을 좋은 신랑감이라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성직자에게는 결혼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현대 이전,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수녀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장소였습니다. 수녀가 되고 싶은 여성들이 지내는 장소 외에도, 많은 문화적 함의가 있었지요. 수녀원에는 많은 아가씨들이 있었는데, 수녀가 되고 싶어 들어온 아가씨보다 부모님 등의 가족이 수녀원으로 보낸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 때 딸을 수녀원으로 보내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어서 결혼시킬 수 없기 때문에 결혼하는 대신 수녀가 되라고 하거나, 아니면 딸을 교육시키기 위해서거나.
첫번째, 지참금이 없어서 수녀원으로 가는 경우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 시대에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으레 그랬듯이, 여성의 지참금이나 집안 조건 등을 보고 혼인을 맺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다. 사교계 문화가 활성화된 근대 이후에는 조건이 좋지 않은 여성도 사교계에서 연애하다가 청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도 생겼지만, 여성은 집에서만 머무르던 시대에는 그런 것조차도 없었지요. 그래서 지참금을 줄 돈이 없는 집안에서는 일찌감치 딸을 결혼히시키를 포기하고, 수녀원으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녀원에 보낼 때에도 이런저런 부대비용이 들기는 했지만, 지참금보다는 훨씬 적었으니까요. 귀족 아가씨를 수녀원으로 보내는 비용은 통상적인 지참금의 절반 이하였습니다.
두번째, 딸의 교육을 위해서 수녀원으로 보내는 경우입니다. 여성이 공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빠른 곳에서도 19세기 말은 되어야 여성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20세기에도 고등교육기관에서 여성을 받지 않는 곳이 많았지요. 비단 대학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학교에도 19세기까지 여학생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럽에는 수백년 된 역사의 학교가 곳곳에 있지만, 여성은 공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은 가정교사를 두는 것 말고는, 아무런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걸까요?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수녀원이었습니다. 중세 시대 수도원이 문화의 산실이었던 것처럼, 여성이 깊이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수녀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수녀원에서 교육받은 명문가의 딸들이 많았습니다. 수녀원에서 자랐다는 것은 당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고, 경건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표상이었던 셈이지요. 이런 풍조는 여성이 제도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1857년에 출간되었고 동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이 작품에서도 여주인공이 수녀원에서 교육받았고, 덕분에 참한 신붓감이라는 평판을 들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돈 파스콸레>가 초연되던 시기, 수녀원은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을 실시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서 가르치는 덕목은 남자 입장에서 선호하는 여성상과 많이 겹쳤기 때문에, 신붓감으로 여러 모로 선호되었지요. '소프로니아'가 수녀원에 있던 아가씨라는 말에, 돈 파스콸레가 수녀와 결혼해도 되냐고 당혹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원하던 조건의 신붓감이라고 반색하는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오페라와 역사의 만남 > 오페라 속의 문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유랑극단 코메디아 델라르테 (0) | 2015.08.29 |
---|---|
베르디의 <리골레토>와 유럽 궁정 어릿광대 문화 (0) | 2015.07.24 |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코르티잔 문화 (0) | 2015.04.03 |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중세 유럽의 외삼촌-외조카 관계 (0) | 2015.02.21 |
푸치니의 <투란도트>와 막연하고 신비로운 동양의 이미지 (0) | 2014.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