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문화사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중세 순례 문화

아리에시아 2015. 10. 10. 11:59

바그너의 작품 <탄호이저>는 중세 음유시인이 남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오페라로, 중세의 문화와 정서가 많이 녹아 있습니다. 예륻 들면 이 작품에는 탄호이저가 베누스(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 영어로는 비너스)를 칭송하는 언행을 하자 사람들이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기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중세 시대에 아프로디테/베누스/비너스가 무슨 욕정의 화신처럼 매도되었다는 문화적 풍토에 근거합니다. 이 작품의 첫장면도 베누스가 육욕에 가까운 갖가지 쾌락을 남주인공에게 제공하는 장면이고요.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만 알고 이 작품을 보면, 왜 사랑의 여신을 저렇게 그렸고, 사람들이 사랑의 여신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저렇게 질겁하는지 당혹해질 수가 있습니다.

 

탄호이저가 "꺠끗한 샘물이 있다면 입을 대어 물을 마시리"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너무 관능적인 가사라는 식으로 기겁하는 장면도 비슷하고요. 중세 시대 음유시인은 무언가 귀중한 것이 있다면 고이고이 떠받들어 모신다는 식의 노래를 자주 불렀고, 이를 통해 사모하는 귀부인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표현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귀중한 것에 손댄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지요. 그런데 현대 감상자의 눈으로 이 장면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샘이 있으면 물 마신다는 걸 가지고 왜 저렇게 난리피우냐는 감상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탄호이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탄호이저>의 남주인공 탄호이저는 유명한 음유시인으로, 베누스의 숲에서 갖가지 향락을 누리다가, 인간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인간세상으로 돌아온 탄호이저는 여주인공 엘리자베트가 여전히 자신을 사모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영주의 조카딸로서, 탄호이저와 사랑하는 사이였지요. 한편 탄호이저는 노래 경연을 하다가, 베누스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자신이 베누스의 숲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버립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경실색하고, 탄호이저가 당장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되지만, 엘리자베트가 간청하여 탄호이저에게 속죄 순례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됩니다.

 

탄호이저가 순례길에 떠난 사이 엘리자베트는 홀로 남아, 끊임없이 탄호이저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탄호이저와 함께 떠났던 순례자들이 돌아오지만, 탄호이저는 용서받기는커녕 참회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는 소식만이 들려옵니다. 탄호이저가 베누스의 숲에 있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교황이 죽은 나무에 다시 싹이 돋지 않는 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말만 남기고 참회조차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탄식하던 엘리자베트는 슬픔에 쓰러져 죽고, 탄호이저는 그 소식을 듣고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부르며 역시 생명이 꺼집니다. 그 때 나무 지팡이에 싹이 돋아나고, 사람들이 엘리자베트의 진실한 기도가 기적을 일으키고 탄호이저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작품이 끝납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탄호이저는 실존인물입니다. 관련 기록이 존재하며, 마네세 필사본에 탄호이저의 초상과 탄호이저가 지은 노래가 실려 있기도 합니다. 마네세 필사본은 다수의 중세의 노래 텍스트와 그 노래 작가의 초상화 삽화를 수록한 필사본으로, 중세 시대 노래를 연구하는 데에는 첫손에 꼽히는 사료이며, 중세의 회화, 의상, 문화 등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필사본에 실린 초상화는 실존 인물을 보고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일종의 상상화에 가깝기에 초상화적인 가치는 애매합니다만, 문화적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는 높습니다. 의상이나 갖가지 문화활동 등을 실존 작가의 직업과 신분에 맞춰서 그렸기에 당대의 신분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며, 작가의 가문이나 도시 등을 상징하는 문장도 같이 수록했기 때문입니다. 노래 가사를 수록한 텍스트 자료로서의 연구가치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마네세 필사본Codex Manasse에 실린 탄호이저의 초상입니다.

 

서울C 남성합창단 1회 정기연주회에서 불린 '순례자의 합창' 영상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순례자의 합창은 탄호이저와 같이 떠난 순례단이 귀환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순례자의 합창' 독일어-한국어 번역 대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원작에서는 순례자의 합창 도중에 엘리자베트와 탄호이저의 동료 음유시인인 볼프람의 대화가 중간중간 삽입되는데, 공연에서는 순례자의 합창 부분만 나오기에, 그 부분만 편집했습니다.

 

 

중세 순례는 일종의 참회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종교적으로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순례를 하면 죄를 씻을 수 있거나 죄가 가벼워진다는 인식으로 생긴 문화였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사실상 봉쇄되었던 시절에도, 순례만은 허용되기도 했지요. 중세 순례의 전반적인 모습은 <탄호이저>에 묘사된 것과 대동소이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교황 등 고위 성직자가 있는 곳이나, 성자나 성녀의 전설이 있는 곳에 순례하여 죄를 참회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칫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하나 있는데, 이 문화는 꼭 지정된 곳에 가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곳에 몸소 가기까지의 노력과 정성을 통해, 얼마나 간절하게 참회와 용서를 갈구하는지 나타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는 쪽에 더 가깝지요.

 

 

순례지에서는 순례지의 전설, 성자 성녀의 일화 등에 따라 특색있는 배지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배지는 일종의 증거품 역할을 하기 위해 시작된 것입니다. 순례지에서만 나눠주는 배지를 지니고 있으면 실제로 그 순례지에 다녀왔다는 증거품 역할을 했으며, 순례지에 가는 사람이 순례지 배지를 착용할 때에는 일종의 신분증명서 같은 역할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오늘날 기념품 수집처럼 이 배지를 모으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오늘날 관광지 기념품의 원조가 이 순례지 배지라는 견해도 많습니다.

 

순례자들은 조개 모양의 배지를 달고 다녔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조개가 순례자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유명한 순례 장소인 산티아고 순례길 곳곳에 조개 모양이 표식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한 예입니다.

 

중세 시대이 순례 배지. 성 토마스 베켓의 순례 배지입니다. 토마스 베켓은 12세기 잉글랜드의 주교로서, 국왕 헨리 2세와 갈등을 빚다가, 헨리 2세의 부하 기사들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토마스 베켓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일로 토마스 베켓은 순교한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중세 잉글랜드가 배출한 최고의 성인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잉글랜드 영어 문학의 금자탑으로 칭송받는 작품인데, 이 작품이 바로 토머스 베켓을 기리기 위해 캔터베리에 순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캔터베리 대성당에는 수많은 귀중품과 금은보석 공예품들이 토마스 베켓을 기리기 위해 바쳐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봉헌품들은 훗날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국교를 바꾸면서 모두 압수하여 개인 재산으로 귀속시켰고, 귀금속과 보석은 재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중세 잉글랜드 최고의 성인인 토머스 베켓을 직접 기리는 문화재는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례자들에게 나눠주었던 토머스 베켓 순례 배지는 현존하여, 토머스 베켓을 기념하는 몇 안 되는 당대 문화재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