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창작한 예술

아들 머리에 놓인 사과 쏘기, 빌헬름 텔 전설

아리에시아 2015. 1. 31. 11:00

한 명사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짜고짜 아들 머리에 사과를 놓고, 그 사과를 맞춰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여차하면 아들을 죽일 수도 있는 명령이었지요. 하지만 그 명사수는 아들 머리에 놓인 사과만을 명중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 명사수의 이름은 바로 빌헬름 텔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스위스 우리 칸톤의 알트도르프에 있는 빌헬름 텔과 그 아들의 조각상입니다. 1895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빌헬름 텔의 이야기가 1307년에 일어났다는 글씨가 받침대에 새겨져 있습니다.

 

 

 

흔히 이 이야기에서는, 아들 머리에 놓인 사과를 쏘아 맞추는 극적인 장면만이 널리 회자되고는 합니다. 왜 지나가던 권력자가 다짜고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배경설명이 곁들여질 때에는 대개 이런 이야기가 뒤따르지요. 빌헬름 텔 이야기는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 스위스 독립 운동과 연관이 있으며, 빌헬름 텔이라는 인물 자체는 실존인물이 아니라고요.

 

 

독일의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1804년 <빌헬름 텔>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발표합니다. 스위스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세력이 이런저런 횡포를 부리지만, 스위스 인들이 맞서 싸워 합스부르크 세력을 물리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과 쏘기 명령은 '권력자의 횡포'를 나타내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동화책 등에서는 모두들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 머리에 놓인 사과만을 명중시키는 장면이 굉장히 극적으로 묘사됩니다만, 막상 실러의 희곡에서는 그 장면은 직접 묘사되지 않습니다. 군중들이 하나같이 그런 명령은 천부당만부당하니 취소해 달라고 청원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사과가 떨어졌어! 사과를 명중시켰다고!" 식으로 외치고, 빌헬름 텔의 아들은 화살에 스친 자국 하나 없이 화살이 꽂힌 사과를 들고 무대 중앙으로 뛰어옵니다. 혹시 화살로 사람 머리에 놓인 사과를 쏘는 것이 연극에서 표현하기에는 곤란해서 그랬던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설사 그런 장면을 상연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고 해도, 굳이 무대에서 직접 표현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원작 희곡에서는 그냥 초반에 스쳐가는 장면 중의 하나니까요. 희곡에서는 합스부르크 세력에 대항하는 투쟁 이야기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이 유명해지면서, 빌헬름 텔이라는 이름과 사과 쏘기 전설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헬름 텔의 이름은 명사수의 대명사로, 그리고 외세 저항의 아이콘처럼 언급되게 되지요.

 

 

빌헬름 텔은 가공인물이지만, 실러가 온전히 창작한 인물은 아닙니다. 아들 머리에 놓인 사과를 쏠 수 있을 정도로 활이 백발백중이라는 이야기는 중세 유럽 설화에 이미 등장하며, 빌헬름 텔이라는 이름도 실러보다 수백 년 전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현존하는 문헌 중 빌헬름 텔이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자르넨 백서 (Weisses Buch von Sarnen, White Book of Sarnen)로, 1474년 출판된 책입니다. 그리고 1554년에 출판된 책에서, 빌헬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쏘는 장면을 묘사한 판화 그림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자르넨 백서

 

1554년의 판화 작품으로, 빌헬름 텔이라는 이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옛날 전설 중의 하나로만 알려졌거나, 어쩌면 세월 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빌헬름 텔 전설은 실러에 의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세계젹으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지방 전설에 잡깐 언급되는 인물인데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앞뒤 문맥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이야기가 명사수의 대명사로서 세계젹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지요. 지역색이 강한 이야기도 창작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세계적으로 널리 유명한 인물로 재창조할 수 있다면, 빌헬름 텔 전설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의 가공인물이 어떤 시기나 사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만들어내고 각인시킬 수 있다는 것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