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창작한 예술

낙화암과 의자왕의 삼천궁녀 전설

아리에시아 2015. 12. 26. 11:01

어린이용 위인전에는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낭설로 밝혀진 야사나 소문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인전에서는 실제 역사로 밝혀진 이야기보다 유명한 이야기를 선택하는 경향을 특히 강하게 보이고는 합니다. 전에 썼던 글 http://blog.daum.net/ariesia/74 에서 교황청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탄압했다는 이야기나, 콜럼버스 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항해계획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으며, 현존하는 근거는 오히려 그 정반대에 더욱 가깝다는 이야기를 언급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위인전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여전히 수록하고 있고, 이런 근거 없는 낭설이 아직까지 널리 퍼진 데에는 이런 위인전의 영향도 클 것입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궁녀 삼천 명을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어린이용 위인전에서 백제 멸망을 다룰 때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대체적인 레퍼토리는 의자왕이 궁녀 삼천 명과 함께 흥청망청 사치하며 놀았으며, 국왕이 그랬으니 백제라는 나라가 쇠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정말 유명합니다. 그런데 의자왕의 궁녀는 정말 삼천 명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를 믿을 만한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악녀도 아니고 딱히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프랑스 국고가 텅 빈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과는 무관하다는 것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http://blog.daum.net/ariesia/40 에서도 언급했듯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사치를 부려서 그 비용을 대느라 프랑스 국고가 바닥났으며 그것이 대혁명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는데, 실제 이유는 세금 징수 담당자들이 세금의 상당 부분을 착복하는 세금 제도와, 프랑스가 연달아 전쟁을 벌인 데 대한 전쟁 비용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의자왕이 삼천 명의 궁녀를 두었다는 당대 기록은 전혀 없으며, 궁녀 삼천 명을 뽑아 유지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는 반증은 넘쳐납니다.

우선 발굴된 당시 백제 왕궁은 삼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훨씬 못 미칩니다. 인구 숫자로 추산해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백제 수도인 사비성에는 약 1만 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토대로 추정하면 사비성의 인구는 5만명 내외로 추정됩니다. 이 중 절반 가량이 여자라고 한다면, 여자 3천 명이란 도성의 여자 중 10분이 1 이상에 해당하는 인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궁녀 3천 명을 뽑았다면 젊은 여자를 주로 뽑았을 것인데, 이것까지 고려한다면 당시 도성의 젊은 여자의 3분의 1~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인원을 궁녀로 뽑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국왕이 막나가느라 그런 터무니없는 명령을 실제로 내렸다고 가정한다면, 당대 기록에 남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없지요. 

이 이야기가 아직껏 유명한 것은, 낙화암과 연계된 측면도 한몫할 것입니다. 낙화암에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이 거느렸던 삼천 궁녀가 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전설이 전해져옵니다. 근처에 세워진 사찰인 고란사에는 이 전설을 주제로 한 벽화도 그려져 있지요.

 

현재의 낙화암 모습입니다. 관광지로서 안전을 위한 울타리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백마강을 굽어보는 위치입니다.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을 그린 고란사의 벽화입니다.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두었다는 이야기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조선 초기의 사대부였던 김흔입니다. 김흔은 1448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백제가 멸망한 지 8백여년 뒤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최초의 문헌은 역사서가 아니었습니다. 김흔이 낙화암을 주제로 시를 지었는데, 바로 이 시에 삼천 궁녀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에서 삼천 명이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숫자라기보다 많다는 것을 표현하는 문학적 수사에 가깝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이후의 조선 시대 문헌 중에서도 의자왕의 삼천궁녀라는 표현이 간간이 등장하지만, 개인이 창작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역사서에서 언급된 사례는 전무합니다.

1941년, 역사소설가였던 윤승한이 김유신을 주제로 한 역사소설을 발표하면서,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뽑았다는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윤승한의 역사소설은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이 현대에 삼천궁녀 전설이 널리 퍼진 계기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윤승한의 소설이 발표된 지 20여년이 지난 1962년, 삼천 궁녀 이야기는 최초로 문학작품이 아닌 역사 계열 서적에 등장하게 됩니다. <국사대사전>을 편찬하면서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두었다고 서술했는데, 이를 통해 삼천궁녀 이야기는 일종의 공신력을 얻게 되었고, 이후 대중역사서와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되며, 마침내 역사기록이 있는 것처럼 알려지기에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