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우스의 <아라벨라 Arabella>는 간단한 줄거리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로맨스 스토리 같습니다. 미모와 기품으로 사교계에서 많은 인기를 끄는 여주인공은 어느 날 우연히 본 이방인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 이방인은 여주인공의 초상을 보고 사랑에 빠져 곧바로 청혼하러 달려온 사람이었다는 거지요. 나중에 오해가 생겨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오해가 풀리고 해피엔딩으로 행복한 커플이 됩니다. 오해가 풀리는 과정에서, 덤으로 여동생도 짝사랑하던 남자와 커플이 되고요.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나의 엘레머 Mein Elemer>는 여러 사람에게서 청혼받았지만, 이름 모를 이방인에게 마음이 끌리는 아라벨라의 미묘한 심리를 묘사한 노래입니다. 구혼자 중의 한 명인 엘레머는 아라벨라를 데리러 마차를 갖추고 나왔고, 츠덴카는 "언니의 엘레머 씨가 정말 조바심내고 있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언니의 엘레머 씨'라는 말을 듣자, 아라벨라는 많은 남성에게 구혼받지만, 아직 마음이 끌리는 상대는 없는 입장으로서 어떤 심정인지를 노래하지요.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가 아라벨라 역을 부릅니다. 1995년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공연입니다. <나의 엘레머>는 1분 35초 경 츠덴카가 "언니의 엘레머 씨"라는 말을 한 직후에 시작됩니다.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나의 엘레머> 대목의 독일어-한국어 대역 대본입니다. 대본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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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엘레머>는 사교계에서 인기 많은 아가씨라는 낭만적인 테마를 잘 살려낸 노래입니다. 간단한 줄거리만 보면 화려한 사교계에서 근심걱정 없이 사는 구김살 없는 아가씨가 인연을 만나는 로맨스 이야기로만 보이지요.
하지만 조금만 파고들어보면, 여주인공 아라벨라의 집안은 번드르르한 귀족 신분만 있을 뿐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모도 영 암담한 행적을 보여줍니다. 우선 사교계에 딸을 두 명이나 내보낼 여력이 없다면서 둘째 딸은 무려 남자 옷을 입혀 남자 노릇을 하게 시킵니다. 여자가 바지는 고사하고, 발목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입는 것도 금기시하던 시대인데도요! 조르주 상드가 여자 옷보다 남자 옷이 더 편하다고 남자 옷을 입고 다니다가 별의별 뒷소문에 시달려야 했던 시대가 불과 20여년 전이었고, 그런 풍조는 1860년대에도 딱히 바뀌지 않았는데도 그랬습니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돈을 벌겠답시고 집에 있는 돈 없는 돈을 마구 긁어모아 도박을 하는가 싶더니, 부자라는 이유로 나이가 엇비슷한 친구에게 딸의 초상을 보내 혼담이 들어오기를 고대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딸에게 옷 사줄 돈은 없으면서, 큰딸이 시집을 잘 갈 수 있을지 점쟁이에게 물어보려 보석을 복채로 지불하겠다고 말하지요. 사교계에 나가려면 필수라면서 고급 호텔에 숙식하지만, 매일같이 청구서가 날아오는데 갚을 방도는 막막하고, 나중에는 와인 한 병 가져다달라고 주문해도 외상이 많아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말이나 듣지요. 아버지가 아라벨라의 초상을 보냈던 친구가 죽어 조카가 상속자가 되고, 그 조카가 아라벨라의 초상을 보고 사랑에 빠져 청혼하러 달려오고, 아라벨라는 아라벨라대로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눈에 반해 행복한 커플이 되기는 합니다만, 조금만 뜯어보면 꽤 암울한 이야기입니다.
귀족 계급과 무도회나 사교계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돈이 넉넉지 못해 사교계에 나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는 합니다. 주인공이 그런 처지에 놓인 경우도 많고, 주인공이나 주변인물이 잡담하는 와중에 그런 처지의 아가씨가 언급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명색이 귀족 계급이니 의식주를 해결할 만큼만 생활하자고 생각하면 적어도 밥을 굶을 걱정은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굳이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선 '귀족으로서의 대외적 자존심'이 그런 걸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게 사교계에서 물러나면 은거하다시피 되어 다시 사교계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도 한몫했지요. 특히 여자가 사회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부유하고 권세 있는 남성과 결혼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여성의 행복이자 성공처럼 여겨지던 시대라서 더했습니다. 어떻게든 딸을 조건 좋은 남편감과 결혼시키는 것이 많은 귀족들의 목표였습니다.
조건 좋은 결혼상대를 찾으려는 풍조는 만국공통입니다만, 여자가 남자보다 부담이 더 컸습니다. 남자는 재산이 없어도 직업을 가질 수는 있었기에 자립할 수는 있었는데다가, 사교계에 걸맞는 차림새를 하려면 여자가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유행에 조금만 지난 옷을 차려입어도 지탄받을 일이었고, 드레스뿐만 아니라 부채, 모자 등 갖추어야 하는 부속물도 훨씬 많았습니다. <순수의 시대>, <기쁨의 집> 등을 쓴 이디스 워튼 등 상류층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이런 측면에 거의 빠짐없이 묘사되고 있는데, 여자가 사교계에 데뷔하며 남편감을 만나야 하는 시대에는 소설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거의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리고 <아라벨라>의 배경이 되는 1860년대 즈음에는, 여자가 사교계에 나가려면 전례 없이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하는 시대가 됩니다. 우선 그 때 유행한 드레스부터가 턱없이 비쌌습니다.
당시 사교계의 모습을 그린 삽화입니다. 19세기 중후반은 오늘날의 패션카탈로그 같은 잡지가 많이 발간되었기에, 당시의 드레스를 그린 정교한 삽화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주인공 보바리 부인은 이런 드레스를 동경하면서, 잡지의 판화 삽화를 모아두며 액자에 걸어두기도 하는 인물로 묘사되지요.
1860년대에는 치마 둘레가 몇 미터에 달하는 크리놀린 드레스가 유행했는데, 이 드레스는 다른 시대에 유행하던 패션에 비해 특히 비싼 드레스였습니다. 치마가 컸으니 그만큼 옷감이 많이 들었고, 또 그 큰 드레스에 촘촘하게 주름잡는 장식이 유행했습니다. 드레스 한 벌을 만드는 데 옷감이 평균 30미터 가량 들어가던 시절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 옷감이 하나같이 실크 등 값비싼 재질인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게다가 리본, 레이스 장식 등도 거의 필수였고요.
게다가 아가씨 패션에 요구되는 구성품도 많았습니다. 이브닝 드레스, 모닝 드레스, 집주인으로서 파티를 열 때와 손님으로서 파티에 참여할 때에는 각각 다른 옷을 입어야 했고, 아가씨가 이런저런 사교계 모임에 무리없이 나가려면 이런저런 다른 용도로 제작한 옷이 열 벌 가까이 있어야 했습니다. 외출하려면 외출복을 따로 입고, 거기에다 외출용 코트를 덧입는 식이었습니다. 위의 <아라벨라> '나의 엘레머' 동영상에서 아라벨라가 입고 있는 옷이 당시의 여성용 외출코트로, 드레스의 규모에 걸맞게 품도 넓고 모피까지 달려 있는 고가품이었습니다. 밖에 나가려면 이런 의상을 일일이 종류별로 갖추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산책할 때 입는 산책복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의상이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모자와 머리장식, 부채, 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가 필요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위의 <아라벨라> 공연 장면에서 여주인공 아라벨라가 외출복을 입으면서 깃털 장식에 모피를 두른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예요. 동영상의 옷차림은 그나마 외출복이라 최소한의 구성품만 갖춘 것이고, 연회나 공식석상에서 차려입으려면 '당연히'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아가씨가 유행에 지난 차림을 하는 것은 손가락질 당할 일이었기에, 수시로 새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게 끝이냐고요? 아니요! 19세기 중후반, 크리놀린 드레스가 유행할 때에는 심지어 속옷까지 최고급 레이스와 실크로 제작하는 것이 예의로 여겨졌습니다. 치마가 워낙 크다 보니 치마 끝이 살짝 들려 속치마가 살짝 보일 때가 많았는데, 그렇게 비치는 속치마가 최고급 소재가 아니라면 망신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거든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영화를 촬영할 때, 영화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속치마를 모두 최고급 레이스 등 값비싼 소재로 마련할 걸 보고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역의 비비안 리가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 그 시대에는 그게 당연한 덕목처럼 여겨졌던 겁니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캐리커쳐로 본 여성 풍속사>에서는 당시의 패션과 그 패션을 풍자하는 풍자화를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어처구니없거나 사소해 보이는 곳에 돈을 쓰는 것이 당시 사교계 예법으로 여겨졌다는 인식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돈 없는 귀족 집안의 아가씨가 사교계에 나가려면 어느 시대인들 힘들지 않았겠느냐만, 1860년대 즈음에 특히 고달팠던 것은 저런 패션이 유행했다는 이유가 큽니다. 자본가 계층이 대두하면서 전통적인 귀족 계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시대적 요인도 있지만, 저런 값비싼 드레스에 각종 사치스러운 장식이 필수품으로 요구되던 시절이라면, 다른 시대에도 정도는 덜할지언정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아라벨라>는 바로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별다른 재산 없이 조건 좋은 결혼상대를 만나기만을 고대하며, 사교계 기준에 맞추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아라벨라는 다행히 자신을 사랑하는데다 재산도 많은 구혼자를 만났고, 아라벨라 자신도 첫눈에 이미 반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해피엔딩을 맞지 못한 아가씨도 많았습니다. 여성이 자립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허용되기 전까지, 오직 조건 좋은 남편감을 만나고 남자의 눈에 들기 위해서 아가씨가 사교계에서 안달복달하는 상황은 패션과 유행만 바뀌었지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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