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푸슈킨의 동명의 작품을 오페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러시아 문화권에서도 손꼽히는 인기를 누리고 있고, 러시아 밖에서는 러시아 오페라 중 가장 널리 공연되는 작품이지요.
<예브게니 오네긴>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세련된 외모의 상류계층 청년 예브게니 오네긴은 상속받을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시골에 내려옵니다. 그 시골에서 친구 렌스키는 마을 유지의 딸인 올가와 함께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지만, 오네긴은 지루하기만 하지요. 그런데 올가의 자매인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반해버립니다. 타티아나는 오랫동안 고민해서 오네긴에게 고백 편지를 쓰지만, 오네긴은 "내가 결혼하겠다면 당신을 반려로 택하겠지만, 난 결혼할 생각이 없으므로 당신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외간 남자에게 이런 편지를 함부로 쓰는 것은 경솔한 일입니다."라면서, 편지를 돌려주며 타티아나의 고백을 거절합니다. 한편 오네긴은 시골 사람들이 자길 두고 뒷말하는 것에 언짢아하며, 홧김에 렌스키의 약혼녀인 올가에게 춤을 신청합니다. 렌스키는 오네긴이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 생각해 결투를 신청하고, 오네긴은 결투에서 렌스키를 죽인 후 외국으로 떠나지요.
몇년 후,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몇년만에 돌아온 오네긴은 기품 있고 우아한 그라민 공작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라민 공작은 뒷배경은 별로 없지만 참한 성품의 아가씨에게 반해 구혼했고, 더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오네긴은 그라민 공작부인이 옛날의 그 타티아나라는 것을 깨닫고 엄청난 변모에 놀랐으며,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몇 년 전 타티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의 편지를 타티아나에게 써보내지요.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이리 대답합니다. 아직 오네긴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남편에게 충실할 것이며, 오네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요. 오페라는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두고 뛰쳐나가다시피 퇴장하고, 오네긴은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며 탄식하면서 끝납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1막 3장, 그러니까 오네긴이 타티아나의 고백편지를 거절할 때쯤, 오페라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과일을 따는 아가씨들이 목가적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서 딸기를 따는 장면이지요. 오페라는 노래와 음악을 중시하는 장르인 만큼, 실제상황에서는 대화 몇 마디로 끝내거나 아예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에 굳이 구구절절한 선율을 붙여 노래를 집어넣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노래하면서 과일을 따는 이 장면도, 그냥 보면 오페라식 과장으로 생각하기 쉽지요. 노래 자체가 워낙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덕에, 딱히 그런 '비현실성'에 신경이 쓰이지도 않지만요.
이 장면만 따로 올려진 동영상을 찾지 못해서, 소리만 녹음된 동영상으로 올립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과일 따는 아가씨들이 부르는 노래의 러시아어-한국어 대역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상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의외로 당시 러시아 사회를 아주 잘 반영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노래를 부르게 시킨 것이지요.
푸슈킨의 원작에서, 오네긴에게 편지를 전한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 와중에 열매 따는 하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요.
김진영이 번역한 을유문화사 번역본에서는 112-113페이지에 해당합니다.
처녀들아 미녀들아
얘들이 친구들아
놀아 보자 처녀들아.
마음껏 놀아 보자!
노래나 한 곡 하며
비밀의 그 노래로
우리들 춤 놀이에
총각이나 꾀어 내자
총각을 꾀어낼 때
저쪽에서 보이면은
멀리멀리 도망가라.
버찌도 산딸기도
새빨간 앵두도
모두 모두 던질 테다.
비밀의 그 노래는
들을 수가 없단다.
처녀들의 이 놀이는
엿볼 수가 없단다.
가사만 보면 정말 목가적이고 발랄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원작에서 이 대목을 볼 때와, 오페라에서 이 장면을 볼 때의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원작에서는 이 바로 앞에 오페라에서는 생략된 몇 줄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 과일 따는 아가씨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저 노래 가사 바로 직전의 9행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 오고,
정원에서 하녀들만 밭이랑 사이로
덤불 헤쳐 열매 따며
주인의 지시대로 소리 모아 노래하네.
(노래하는 바람에
그 발칙한 입안으로
주인집 열매를 살그머니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니.
영악한 농촌의 발상 아닌가!)
그러니까, 하녀들이 과일을 따면서 몰래 먹을지도 모르니, 뭘 먹을 수 없도록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배경은 19세기 초 러시아입니다. 당시 농노와 하녀들을 부리고 있던 영주들은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것도 아랫사람에게 시켰는데, 과일을 따면서 몰래 과일을 먹지 않는지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뭘 먹을 수 없도록, 노래를 부르면서 과일을 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명령을 어긴 것으로 취급해, 엄히 단속했고요. 이런 풍조는 비단 19세기 초반에 잠깐 있었던 것도 아니라, 꽤 유구하고 오랫동안 이어진 풍조였습니다.
아랫사람을 부리며 일을 시키면서, 중간에 뭘 가로채지는 않는지 의심하며 감시하려는 경우는 정말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감시자를 붙이는 등 여러 편법이 생겨났지요. 실제로 그런 시도가 끊임없이 적발되었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단속하려 했습니다. 심부름꾼에게 물건을 들려 보내면서 무슨 물품을 얼마만큼 보내는지 아예 물목을 따로 적어 전달하게 하는 일은 예사였고, 별의별 발상이 튀어나왔습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평화로울 정도로 목가적이고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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