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사교계 데뷔 무도회, 즉 데뷔탕트 무도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다소 엉뚱하게도 오페라였습니다.
<오페라 보다가 앙코르 외쳐도 되나요?> 책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이었지요.
오페라 극장 티켓 중 가장 비싼 티켓이 바로 빈 슈타츠오퍼, 즉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사교계 데뷔 무도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전 그 때에만 해도 데뷔 무도회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귀족이 있던 시대에 귀족들이 사교계 데뷔 무도회라는 행사를 가졌고, 귀족 신분제가 사라진 뒤에도 전통 행사처럼 이어진 것 정도로 생각했지요.
사교계 데뷔 무도회가 빈 국립 오페라극장만의 전통 행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뒤였습니다.
사교계 데뷔 무도회 문화가 처음 생긴 것은 영국입니다.
사교계 문화는 나라마다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국왕의 정부가 사교계를 이끌고 정부가 세력을 형성하면서, 나라의 장관이나 장군 등을 바꾸거나 새로운 책을 유행시키고 보급하는 등, 정치적인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그리고 사교계에 왕족을 제외하면 미혼 여성은 참여할 수 없고, 기혼 여성만으로 사교계 행사가 구성되었습니다.
왕비는 그런 사교계 움직임에 딱히 참여하지 않았으며, 마리 앙투아네트가 저런 사교계 행사를 맡은 것이 당대에는 왕비가 귀족들에게 민심을 잃은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황후나 황태자비가 직접 황궁 사교계를 이끌었으며, 황후나 황태자비가 황족이나 귀족 여인들과 사교계에서 친교를 유지하는 것이 황실의 입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에서 사교계란 철저하게 결혼을 위한 무대로만 기능했습니다.
영국 사교계에서 여성의 역할은 미혼 시절 사교계에서 활동해 남편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런던 시즌이라고 불리는 사교계가 유명했습니다. 평소에는 귀족들이 시골의 개인 저택인 컨트리 하우스에서 살다가, 의회가 열리는 시기에 런던에 와서 런던 저택인 타운 하우스에서 살게 됩니다.
그 때 미혼의 남녀들은 런던에서 여러 사교계 행사에 참여하면서, 결혼 상대를 찾는 것입니다. 마음이 맞고 서로 결혼을 약속하는 상대가 생기면,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빠지면 결혼 상대를 찾기는 힘들어지지만, 사교계 평판만으로 정치적으로 보복당하는 등의 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교계의 평판이 나쁜 것을 감수하고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교계 평판이 아무리 나빠도 엄연히 법적으로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유독 영국에서 사교계 데뷔 행사가 따로 생긴 것은, 이런 문화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국의 사교계에서 여성이 정식으로 데뷔하는 행사는 아주 중대한 의례처럼 여겨졌습니다.
데뷔 행사의 아가씨들은 데뷔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데뷔턴트라고 따로 불렸고, 무려 왕궁에서 왕비나 여왕에게 직접 알현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왕궁에서 왕비나 여왕에게 알현할 자격이 있다고 선정된 미혼 여성들은 새하얀 옷을 차려입고 왕궁에서 알현식을 가졌습니다. 알현식이 무사히 끝나면, 따로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영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도 훗날 데뷔 무도회가 줄줄이 생겼고, 데뷔 무도회에서 데뷔하는 여성들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는다는 전통은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이런 무도회는 데뷔탕트 무도회, 혹은 데뷔턴트 무도회라고 따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왕비나 여왕을 알현하는 절차는 사라지고, 그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무도회만 남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20세기 중반, 공식적으로 귀족 신분과 왕족이 있는 나라인 영국에서는 데뷔턴트 무도회가 사라집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폐지했기 때문이지요.
그 외에도 영국에서는 귀족과 왕족 신분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놓고 신분을 강조하며 호화롭고 화려하게 열리는 사교계 행사는 은근슬쩍 사라졌습니다.
만약 그런 행사가 계속 열렸다면, 귀족과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많은 특권을 누린다는 인식과, 그런 인식에 따른 일반인의 반감이 더욱 강해졌겠지요.
역설적인 것은 공식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된 다른 나라에서, 데뷔 무도회를 비롯한 화려하고 호화로운 사교계 행사가 오히려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더욱 폐쇄적으로 끼리끼리 모이는 방향으로요.
이 역설이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데뷔 무도회로 불리는 '발 데 데뷔탕트' 무도회입니다. 1992년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났고, 그 이후 권위 있는 사교계 무도회로 자리잡았지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프랑스, 공식적으로는 귀족 신분이 완전히 사라진 프랑스에서, 이른바 상류층으로 통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면서 자신들의 딸을 화려한 드레스와 함께 데뷔시키는 행사가 부활하며, 권위까지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분제가 사라졌더니 오히려 귀족 태생 이외의 새로운 상류층이 생기는 것은 흔한 현상이지요.
19세기 말 미국의 이른바 유서 깊은 상류층이 신흥 부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교계 행사에 초대하지 않고 무시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막상 신분제 왕국에서는 데뷔 무도회 등 대놓고 상류층끼리만 모여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화려한 사교계 행사 전통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는데, 신분제를 없앤 공화국에서 그런 전통을 만들어내서 권위까지 부여한다는 점은 여전히 역설적으로 느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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