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카법은 흔히 동양식 남계 상속처럼, 남자 후손만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법처럼 여겨지고는 합니다.
이른바 왕위계승의 살리카법은 대개 그런 의미로만 통용되었기에, 결과적으로는 대충 들어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살리카법을 남녀차별처럼, 여성이 후계자가 될 수 없는 제도로만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살리카법은 딸이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우회적으로 딸의 후손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가능하기는 했습니다.
외손자가 물려받거나, 아예 사위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삼아서 딸과 사위의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지요.
딸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법률 조항이 처음 기록된 것은 중세 초기입니다.
그 떄에는 땅을 가진 영주는 직접 전투에 나서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영주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생긴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면에서 초창기 살리카법은 여성은 후계자로 삼으면 안 된다는 뜻보다, 직접 전쟁에서 싸울 수 없다면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막상 그 법률은 얼마 후 거의 잊혔습니다. 프랑스에서 14세기 초 필리프 5세가 새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살리카법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뒤늦게 옛 문서를 살펴보다가 알아낸 것이지요.
살리카법을 프랑스 왕국에서 처음 도입한 상황도, 사전적인 의미의 남녀차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필리프 5세의 형인 루이 10세는 딸 한 명만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흔히 그 딸 잔느 대신 필리프 5세가 난데없이 살리카법을 들먹이면서, 잔느의 왕위를 가로챈 것처럼 묘사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루이 10세의 딸 잔느가 루이가 왕세자이던 시절 태어났을 때, 잔느의 어머니이자 루이 10세의 아내이던 마르그리트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었기 때문입니다.
잔느가 태어난 뒤 그 사실이 알려졌으며, 일명 넬 탑 사건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국왕 필리프 4세의 세 왕자 중 왕세자와 셋째 왕자의 아내가 각각 귀족 형제와 넬 탑에서 밀회했고, 둘째 왕자의 아내는 그 사실을 알면서 묵인하거나 도와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왕자의 아내가 나란히 감옥 등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잔은 그 시기에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잔느의 아버지가 루이 10세가 아니라 넬 탑의 다른 남자라는 의심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루이 10세가 죽고 자녀라고는 잔느만 남게 되자, 루이 10세의 남동생이 난데없이 살리카법을 들고 나와서, 공식적으로 국왕의 딸인 잔느 대신 남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떄, 널리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잔느는 훗날 프랑스 국왕이 다스리던 땅 중 나바라 왕국은 물려받게 되지만, 훨씬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막상 그렇게 왕이 된 필리프 5세는 아들은 일찍 죽고 딸만 있어서, 필리프 5세가 죽은 뒤 왕위는 딸이 아닌 남동생에게 넘어갑니다. 그 남동생 역시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어서, 필리프 4세의 후손 대신 그 다음 남자 친척에게 프랑스 왕위가 물려지게 됩니다.
살리카법이 이렇게 유럽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뒤, 여러 왕실에서는 살리카법을 차츰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이것 역시 남녀차별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딸에게 후계 자격을 주면, 곧 다른 가문의 사람에게 후계 자격이 넘어간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백년 전쟁은 바로 저 점이 명분이 되었던 전쟁입니다.
필리프 4세의 세 아들이 모두 아들 없이 죽어서 방계 친척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을 때, 필리프 4세의 외동딸의 아들이 후계자 자격을 주장한 것입니다.
필리프 4세의 외동딸인 이사벨라는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했고, 그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었습니다.
공주의 계승권을 인정한다면, 왕자 직계 혈통이 끊겼을 때 외국에 시집간 공주의 아이들이 다음 왕이 될 상황이었던 거지요.
정략결혼으로 외국 여러 나라에 공주를 시집보내던 시대에, 이것은 다른 나라 왕실에 계승권을 넘겨주는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촌수가 먼 방계여도 국내 왕족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외국에 시집갈 공주의 후손에게 계승권을 인정하는 것보다 나라 입장에서 더 낫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게 살리카법이 유럽 여러 나라에 도입된 진짜 이유입니다. 사전적인 남녀차별과는 좀 달랐지요.
그래서 살리카법이 있던 신성로마제국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우회적으로 후계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선대 황제의 사위로서 새 황제가 되었고, 그것은 엄연히 남자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기에, 살리카법으로 반대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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